사순 5주간 토요일 (요한 11,46-56)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에제키엘은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당신 백성을 다시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해 주시면, 그들은 다시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에제키엘서 37,21ㄴ-28)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면서, 혹시라도 로마인들이 성전과 이스라엘 민족을 짓밟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카야파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실 것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요한 11,46-56)
예레 31,10.11-12ㄱㄴ.13(◎ 10ㄹ 참조)
◎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 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요한 11,47-48)."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표징'(기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아닌가? 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겉으로는 로마인이 와서 성전과 민족을 짓밟는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이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믿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자기들의 지배력과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대사제인 카야파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이 말을 간단하게 바꾸면, "걱정만 하지 말고 예수를 죽이자."입니다.
1) 온 민족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입니다. 죽는 사람 쪽에서는 '희생'이 되겠지만, 죽이는 쪽에서는 살인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희생은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강요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대사제가 "온 민족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내가 죽겠소." 라고 말했다면, 이것은 숭고한 희생입니다.
2) 대사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민족을 위한 일이 아니라, 기득권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 이 말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사제는 겉으로는 민족을 걱정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의 이익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기득권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와서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루카 18,1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8,22).
복음서 저자는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루카 18,23), 그가 슬퍼한 것은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부자'를 '기득권 계층'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기득권'은 꼭 세속적인 것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누리는 권력이나 지위 같은 것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 권력이나 지위가 영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하는 낙타가 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만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서 재판을 하기도 전에 사형을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재판은 사실상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죄목을 정하기 위한 요식 행위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사형시킨 전 과정이 하느님의 법으로도 불법인 일이었지만,
사실 로마법으로도, 또 유대법으로도 불법이었습니다.
독재정권 시절에도 그런 식의 재판이 많았습니다.
권력층에서 내부적으로 사형을 결정한 다음에 형식적인 절차만 거친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재판 자체가 불법이고 무효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없을까? 하나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서 저자는 대사제가 한 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51-52)
이 말은 '예수님 죽음'의 성격과 의미를 설명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당하신 것은 무슨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대사제는 자기가 예언을 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그냥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대사제가 자신도 모르게 예언을 한 셈이 되었다는 것은,
대사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 죽음'의 성격과 의미를 하느님께서 설명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흩어져 있다는 뜻은 아니고,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로 모으다.' 라는 말은 '구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반영억 신부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굿은 일에는 나이고 생색나는 일에는 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한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기업이 외국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한국의 드라마는 ‘구성, 연기, 의상, 심리묘사’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권선징악, 고진감래, 사필귀정, 호사다마, 회자정리’ 등의 삶의 모습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특징은 ‘출생의 비밀’이 많은 것입니다. 주인공은 갖은 고생을 하곤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주인공을 끝없는 궁지로 몰아가곤 합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역경을 이겨내고, 따듯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기도 하고, 악을 물리치고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저는 1963년 4월 15일에 태어났습니다. 제 인생의 드라마는 53년 동안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건강을 타고 나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1991년 유행성 출혈 열로 고생을 하였고, 2012년 발목 골절로 수술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통풍과 혈압도 오랜 친구로 함께 지내고 있고, 치아가 좋지 않아서 거친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편입니다.
2년간 캐나다에서 살기도 했고, 여행도 많이 다녔고, 사제로서 24년을 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시련은 있지만 절망은 없다.’는 말처럼 주어진 하루를 기쁘게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드라마는 어떠하신지요? 어떤 환경에 있어도 인생의 드라마는 본인이 주인공입니다.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삶이 고단해도 하느님께서는 감독으로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여러분들의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의 절정인 ‘성주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인 드라마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 죽음, 부활의 드라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새로운 역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러분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지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저버린 빌라도, 무관심으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군중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낙원에 들어간 죄인일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오상선바오로 신부
참으로 지당하고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카야파가 한 말입니다.
그해의 대사제로서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했다면 참으로 멋진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남을, 예수를 그 희생제물로 삼자는 이야기이니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하나로 모으고 흩어지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또다른 희생제물이 필요할까요?
그것이 천안함 장병들인가요?
세월호 학생들인가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데 기여하는 참다운 희생봉헌이 되기를 빌어야겠지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일상의 삶 안에서 남을 위해 더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또다른 예수,
제2의 예수(alter Jesus)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남이 아니라 내가 자청해서 되어봅시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고 부활하는 길임을 명심합시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부활을 맞이합시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불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다교 지도자들은 위험을 느끼며 전전긍긍 했다. 사실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믿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유다교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중 에서도 대사제인 가야파는 서둘러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예수님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위험인물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가야파는 막강한 의회의 권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대사제는 산헤드린 의회의 의장과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지도자였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은 사실상의 국가적 구속력을 갖는 회의였다. 회의를 주재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가야파였다.
대사제는 본래 종신직이었으나 대사제의 편중된 세력을 경계한 로마 정부가 임기를 제한하고 임명 제도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면서 제관들 사이에경쟁이 생겨나고, 대사제는 로마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버리는 정치가로 전락해 버렸다.
로마의 통치 하에 대사제는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유다 민중을 괴롭혔고 또 성전은 재산 축재의 사유물이 되어버렸다. 정치 지도자들은 종종 자신의 욕심을 공적인 권력과 명분을 이용해서 채우려 한다. 여기서 의회란 산헤드린 의회를 말한다. 산헤드린 의회 구성원은 제사장, 바리사이파, 서기관, 사두가이파, 백성의 원로들로 구성된 71명으로 유다인의 최고기관이다.
"여러분 예수의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모든 백성이 그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유다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로마인들과 마찰을 빚을 것이고, 로마인들은 여러 정치적 구실을 들어 우리 유다교를 박해 할 것입니다. 어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는 분명히 위험한 인물이지만… 백성들의 인기도 높으니 섣불리 손 댈 수는 없을 텐데…"
회의 벽두부터 가야파의 각본대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대개 이런 회의는 철두철미하게 준비되기 마련이다. 회의는 요식 행위일 뿐이었다. 회의가 열기를 더 할수록 예수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무르 익었을 때 가야파는 속셈을 드러냈다. "이제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백성 모두가 다치는 것보다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가야파는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한 사람을 희생하여 나라 전체를 살리는 논리를 펴나갔다. 가야파는 이미 대사제의 직분을 잃고 스스로 정치꾼이되어 있었다. 그의 결정적인 잘못은 진리보다는 피해를 보지 않고 더 많은 이익을 보겠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사제의 직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들은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 많은 이익을 우선해서 진리를 배척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러한 회의 분위기에서도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더 극렬하고 무조건적으로 행동을 불사한다.
"옳소! 어서 끌어다 재판을 받게 해서 사형에 처합시다!"
"그럴 순 없소. 완전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는 기다립시다."
소수의 신중론도 있었지만 이런 강경한 분위기에서는 금방 묻혀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피해를 두려워하며 침묵을 고수한다. 사실은 대다수의 침묵자는 죄악의 동조자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죄악을 꾸미고 행동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불의를 보고 그냥 눈을 감는다면 그건 죄악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은 가야파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 후 자신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심판하고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건에서 처럼 다수결의 원칙에 의한 결정이 항상 진리는 아니다.
가야파의 결정은 비록 정치적이나 세속적으로는 인정될지 몰라도 신앙의 차원에서는 아주 그릇된 것이었다. 가야파와 당시의 유다교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강한 세속의 유혹과 늘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교회는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설사 교회의 위험이 닥치더라도 진리를 포기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출처: 평화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