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3.30. 성주간 월요일, 이사42,1-7 요한12,1-11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종을 부르신다.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성실하게 공정을 편다. 하느님께서 그 종을 부르신 것은 민족들의 빛이 되어 인간을 해방하시기 위해서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노래가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본다.(이사야 42,1-7)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값진 향유를 발라 드린다. 이는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행위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그들과 함께 계시지는 않으시리라고 하신다. (요한복음 12,1-11)
시편 27(26),1.2.3.13-14(◎ 1ㄱ)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악인들이 달려들어 이 몸 삼키려 해도,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 ◎
○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주간 월요일과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걸쳐 이사야서 제2부(40―55장)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네 편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특히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이 노래들에 나타난 종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네 노래 가운데 첫째 노래인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종을 부르십니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종을 선택하십니다. 해방을,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기 위해 종을 보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주간에 봉독되는 다른 세 편의 종의 노래에서처럼, 주님의 종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의 수고는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종을 박해하고 마침내는 죄인으로 몰아 죽이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은 다른 이들의 병고와 고통을 짊어진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그는 많은 이를 의롭게 합니다.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주님의 종의 노래들에 담긴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이 노래들이 얼마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봅니다. 불의와 폭력에 희생된 죽음,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받아들여진 죽음! 결코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온유한 종은 이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죽임을 당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송영진 모세 신부
베타니아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요한 12,2),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요한 12,3). 그러자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라고 말합니다(요한 12,5).
복음서 저자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요한 12,6). 유다가 한 말은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장면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요한 13,27-29)."
유다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돈주머니에 있는 돈을 가로채는 도둑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면서 공금 횡령도 했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마리아의 향유 값을 아까워한 것은 자기가 가로챌 수 있는 돈을 생각하면서 아까워한 것입니다.
도둑질과 공금 횡령과 탈세 등으로 부정 축재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의 돈은 감추어 두고, 약간의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면서 '착한 사람'으로 소문난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서 속았습니다. 그렇게 '위선'으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유다는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착한 사람인 척 했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예수님 말씀의 뜻은, "마리아의 행동은 내 장례를 미리 행한 것과 같으니 그냥 놔두어라."입니다. 마리아 자신이 정말로 그런 뜻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알고 그랬다면 마리아의 예지력을 나타내고, 모르고 그랬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한 것이 됩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생각하다가 향유를 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마리아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때에 슬프게 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향유를 다 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부은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여라."로 해석하기도 하고,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마리아 입장에서 생각할 때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과 사랑과 정성을 드린 일이었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내 장례는 특별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리아의 행동은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에 마리아를 나무라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내 장례는 특별한 일이지만,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니, 언제든지 소홀히 하지 마라." 예수님 말씀은, 특별한 경우에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주간과 부활절 전례와 행사가 중요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평소에 하던 사랑 실천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넓게 생각해서, 교회의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전을 신축한다는 이유로 사랑 실천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성전을 지을 돈도 모자라는데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 라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성전 신축을 조금 뒤로 미루는 것이 옳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만, 하느님 사랑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의 사랑이 다른 사랑과 대립될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랑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하나입니다.

모두를 줄 수 있는 사랑 반영억 신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이사 42,3)
성주간을 시작하며
우리는 주님의 종의 노래를 듣습니다.
오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첫 번째 종의 노래의 주제는 "공정"입니다.
주님의 종은
공정하신 하느님처럼
성실하게 공정을 펼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공정한 사람입니까?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십니까?
성주간의 첫 번째 숙제는
공정한 사람이 되라는 요청입니다.
내가 공정한 사람이 될수록
하느님을 닮은
주님의 참 종이 되니까요.
오늘 주님의 종 답게
성실하게 공정을 펼쳐봅시다.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