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화요일] (요한 3,7ㄱ.8-15)

2015. 4. 14. 오전 7: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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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화요일] (요한 3,7ㄱ.8-15)

 

사도행전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재산을 함께 소유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을 넘어, 그들의 형제적 친교를 보여 준다(사도행전 4,32-37).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계속된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니코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듣고 당신께서 아시는 것을 증언하신다(요한복음 3,7ㄱ.8-15).     

 

시편 93(92),1ㄱㄴ.1ㄷ-2.5(◎ 1ㄱ)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기도 생활도 중요하고 말씀의 증거도 중요하였지만,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었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실천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 복음의 이상을 실현하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그리스 말로 같은 단어인 “위로부터”와 “다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코데모는 이 말씀을 자기가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하늘 일”에 관한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세상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의 인간적인 논리로는 “하늘 일”을 담아내기에는 늘 부족하였습니다.

오늘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또한 예수님의 장례 때에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온 것도(요한 19,39 참조),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11). ‘너희’와 ‘우리’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니코데모처럼 우리에게도, 진리를 찾는 마음과 그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공존합니다. 우리가 현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왜 하필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을까요? 일부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그분을 찾아뵈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진실을 찾아 고뇌하고 방황하는 상황을 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2부- 아담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남긴 열매 -(3) //아담, 구속, 십자가, 예수, 둘째아담, 타락, 그리스도, 형벌, 용서

<십자가>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이 사람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실 수 있습니다.그러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세상에는 자칭 구세주도 많고, 자기가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은 없고, 다른 진리도, 다른 생명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 말씀도,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뱀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민수 21,4-9).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도 사람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없애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믿음이 어떤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항상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고, 자기들이 지은 죄를 회개했고, 그래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구리 뱀이 우상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또 모세가 왜 구리 뱀을 만들었는지를 잊어버리고, 하느님도 잊어버리고, 그 뱀 자체를 섬기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열왕기 하권에 히즈키야 임금이 그 뱀을 없앤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즈키야는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 그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2-4)." 

만일에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또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현세적인 복만 바란다면, 그런 사람이 사용하는 십자가는 그냥 우상이 될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리 뱀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옛날의 사형도구일 뿐입니다. 금으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팔찌를 만들어서 팔에 차고 다닌다고 해도, 그것은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과 부귀영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설교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영원한 생명과 회개는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설교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을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즉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복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있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으로 생각하면서 이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들도 있는데, 바오로 사도가 말한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현세가 아니라 내세를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현세의 복과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표지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표지이고,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으라는 표지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 말씀에서 '세상일'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을 뜻하고, '하늘 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뜻하는데(요한 3,5), 이 말씀의 속뜻은, "하늘 일을 바란다면 먼저 세상일을 잘하여라.",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먼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라."입니다. 

또는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늘에서의 복을 받기를 바라느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 4,32)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함께 살기로 작정합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공동생활을 시작합니다.
각자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내것을 주장하지 않고 다 우리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유에 집착함이 없으니 모두들 영으로 자유로와집니다.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쁨 가운데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어찌 이게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수많은 수도공동체들이 바로 이러한 초대교회 공동생활을 모델로 삼고있지요.
수도자들에겐 내 것이라곤 없습니다.
다 우리 것일 뿐입니다.
많이 번다고 다 내것이 아니요.
집에서 청소만 한다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수도공동체 안에는 아무도 궁핍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모두가 부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것을 다 내어놓으니 가난하고
내어놓은 것을 다 모으니 늘 차고넘칩니다.

왜 이러한 논리를 더 확장시키지 못하는 걸까요?
사실 내 것이라는 건 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수고의 댓가인데
왜 내것이라고 자꾸만 우기는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액을 총인구수로 나누면
모두가 궁핍하지 않고 모두가 풍요로울 텐데...
내것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좀 내려놓읍시다.
내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제발 우기지 맙시다.
그래야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 신부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이 꽃을 피우며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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