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아, 왜 우느냐?” (요한 20,11-18)

2015. 4. 7. 오전 7:30:54

글자

 

유다인들을 향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이어진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이심을 설명한 다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성령을 약속하신다(제1독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마리아는 처음에 그분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뵙고 “라뿌니!” 하고 부르면서 감격한다(복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사도행전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시편 33(32),4-5.18-19.20과 22(◎ 5ㄴ 참조)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한 가지 사건을, 복음서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 곧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의 연속입니다. 이 복음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주일 복음에서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했고, 제자들이 무덤을 다녀간 다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는 울고 있고, 예수님을 뵙고서도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어느 수녀님에게서, ‘제자들이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왜 알아 뵙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수녀님에게 되물었습니다. “수녀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고 느끼세요?” 교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부활하신 분의 몸은 우리의 몸과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고, 성서적으로 설명한다면 발현은 발현하신 분께서 보여 주셔야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까지는, 바로 내 앞에 그분께서 서 계시더라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알고 지내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했다면, 그것은 눈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분명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온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면서 간절히 그분을 찾는다면 언젠가 그분께서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 그들이(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요한 20,11-14)." 

"여인아, 왜 우느냐?"를 "여인아, 울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그러니 울지 않아도 되는데 왜 우느냐?(울지 마라.)"

마리아는 슬픔이 너무 커서 천사를 보면서 놀라지도 않습니다.

또 예수님을 보면서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고 물으십니다(요한 20,15).

이 말씀은, "내가 바로 네 앞에 있는데, 왜 울면서 나를 찾느냐?"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왜 우느냐?"는 "울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분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졌기 때문에 우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슬퍼서 우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래서 "왜 우느냐?" 라는 말은 우는 이유를 묻는 말이 아니라 위로하는 말로,

즉 "울지 마라(슬퍼하지 마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울지 마라." 라는 말에서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 (루카 7,12-13)"

여기서 "울지 마라." 라는 말씀은

"내가 네 아들을 살릴 터이니 울지 마라(슬퍼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젊은이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루카 7,16).

그들이 말한 하느님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그런데 정반대가 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울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기는커녕

당신도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예수님의 눈물은 라자로 남매에 대한 사랑,

또 여러 가지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슬픔 등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울지 마라." 라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울고 있을 때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뭔가를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을 때,

당신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슬픔을 보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리아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고 있을 때 함께 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부활을 안 믿는 것을 꾸짖으시긴 했지만,

슬퍼하는 것을 꾸짖으신 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면서 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해도 슬픈 것은 슬픈 것입니다.

"왜 믿는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는가?" 라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 다음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사도 8,2)."

'독실한 사람 몇'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

그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테파노를 생각하면서 '크게 통곡'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접을 받으면서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스테파노 자신이 증언하면서 숨을 거두었으니(사도 7,55-60)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낸 사람들도

스테파노가 하늘나라로 들어갔음을 믿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스테파노와 갑작스럽게 이별한 것에 대한 슬픔,

또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 세상에 대한 슬픔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인간 세상의 슬픔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가 슬퍼하면서 우는 일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는 슬픔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잃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이별이 슬퍼서 울더라도,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깐 동안만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영억 신부

 

우리는 너무도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추수 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 한20,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하나 봅니다. 자기 안에 갇히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넋이 나갔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고 하신 그대로 입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 한20,18).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그 아들과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랑이 주님께로부터 나오지 않고서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많이 사랑합시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매일미사(다해) 10-07-22]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5)

팽목항을 다녀왔습니다.
그냥 눈물이 줄줄 나왔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물으시나이까.
몰라서 물으시나이까.
자식을 어처구니 없이
차디찬 바닷물 속에 묻은 여인에게 왜 우느냐구요...


진실규명은 외면하고
자식을 팔아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 부모로 몰아가는
정부와 사회를 향해 피눈물과 피울음을 쏟아내는 여인에게
왜 우느냐구요...

누구를 찾느냐구요... 몰라서 물으시나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자식이 다시 살아돌아오길 기다리진 않겠지요.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부끄러운 부모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을 뿐이지요.

네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네요.
여전히 4월 26일이고
골고타 십자가상에 매달려 있는 주검들만 있네요.
아직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데 모두들 그만 두자고 하네요.

부활하신 주님
당신처럼 저들도 십자가에서 내려져 묻히게 하소서.
그래야 당신처럼 부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주님!
부활케 하소서.

 

오상선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