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증인이다 (루카 24,35-48)
베드로의설교
베드로가 불구자를 치유하여 그가 일어나 걷게 되자 사람들은 이를 놀랍게 여긴다. 베드로는,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그 병자를 낫게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치유와 그들의 설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사도행전 3,11-26)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물고기를 드셨다고 전한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증언을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확증해 주신다.(루카 24,35-48)
시편 8,2ㄱ과 5.6-7.8-9(◎ 2ㄱㄴ)
◎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 알렐루야.)
○ 주님, 저희 주님,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
○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 ◎
○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어제 복음은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을 통해 어떻게 그분을 알아 뵐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구약 성경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메시아는 고난을 겪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희망을 두었던 많은 이도 그분의 죽음에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도 예루살렘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메시아는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예언했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당연한 일이었고, 성경 말씀대로 그분이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세 차례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은 오히려, 메시아는 바로 그런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십자가로 처형한 바로 그분이 메시아시라고 과감히 선포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이가 그랬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메시아가 사람들 손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곳곳에 십자고상을 걸어 놓고서도,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고통과 십자가의 예수님이 아니라 영광의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아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 가운데에>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도(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루카 24,35-36)."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사도들에게 가 보니,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모여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루카 24,33-34). 그 두 제자도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상황은 겉으로만 보면 단순히 자신들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사실은 '서로 믿음을 증언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함께 모여서 서로 기쁜 소식을, 즉 복음을 나누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복음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믿음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증언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신 일 자체가 표징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기뻐하기는커녕 놀라면서 무서워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7)."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예수님께서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셨습니다(요한 20,19).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과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사라지십니다. 어디에서 오셨다가 어디로 가신 것일까? 왜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시지 않으신 것일까?
사도행전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사도 1,3)." '여러 번 나타나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일을 여러 번 반복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르는 어떤 곳에서, 또 제자들이 모르는 어떤 일을 하셨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세상 끝 날까지'는 있는데, '언제부터'가 없습니다. 그 대신 '언제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뜻을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있겠다.'가 아니라 '있다.'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부터 그들을 떠나신 적이 없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 때에도 떠난 것은 제자들이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물론 '몸'이 떨어져 있었던 때는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 ('마음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입니다.)
우리는 부활 후에도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딘가로 가셨다가 갑자기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이 보기에 그랬다는 것이고,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제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떠나신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인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오신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 가운데에' 계셨는데 제자들이 알아보기도 하고, 못 알아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필요할 때에만 잠깐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인간들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일들도 인간들 곁에 안 계시던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오신 일이 아니라,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모습을 감추신 것은 아니고, 부활 후에는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것으로 존재 양식을 바꾸신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지금 이곳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공동번역)."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이(예수님이) 당장 우리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어려운 점이긴 합니다. 또 어떤 영적인 체험 같은 것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도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한 번 믿는다고 다 되는 생활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반영억신부
'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인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도 합니다. 명확히 알지 못하면 힘이 될 수 없고, 아는 만큼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혹스러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사도 3,17)
죄에는
알고도 짓는 죄가 있고
무지한 탓에 짓는 죄도 있습니다.
알고도 짓는 죄는
정말 나쁘고 벌받아 마땅하지만
무지해서 지은 죄는
참작이 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한센 어르신들을 모시고 살면서
한센병을 잘 몰라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 지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약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핍박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축함은
더이상 골고타의 억울한 십자가를 만들지 않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제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하소서.
섣부른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부활을 참으로 경축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함은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막달레나 마리아처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마음의 눈이 가려진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눈을 열어주소서.
믿음을 주소서.
주님!
오늘도 당신의 몸과 피를 매일 먹고 마시면서도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함은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도 완고했던 히브리인들처럼,
제 목이 뻣뻣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지금 제 목을 내리치소서.
주님!
이제는 제가 입을 벌리오니,
제 목구멍에 말씀을 부어넣으소서.
제 뼈와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리이다.
이제는 제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비록 제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어도,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결코, 성경을 깨달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미처 저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도
당신의 영으로 하여 제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제 마음에는 이미 당신의 말씀이 새겨져 있사오니,
당신 말씀이 제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
오, 주님! 오직, 당신만이 제 마음의 주인이오니,
제 마음 가져가소서. 몽땅 가져가소서. 아멘.
출처 :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회. 글쓴이 : 올리베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