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마르코 16,9-15)

2015. 4. 11. 오전 7:40:49

글자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2015. 4. 11. 토)(마르 1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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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하고 설교하는 사도들과, 그 이름으로는 가르치지 말라고 맞서는 이들이 계속해서 대립하는 상황이다. 유다 지도자들은 끈질기게 사도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강력하게 저지하려고 하지만 명백한 표징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대답한다. (사도행전 4,13-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고 그다음에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이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 그 뒤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마르코 16,9-15)     

 

시편 118(117),1과 14-15ㄱㄴ.16-18.19-21(◎ 21ㄱㄷ 참조)
◎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종합해서 전하는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완고해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 했다고 증언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분께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도 믿지 않았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스승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복음서의 이 꾸짖음은 우리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도들은 부활하신 분을 목격한 이들이고, 우리는 단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전해 들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선언합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의 믿음은 사도들의 증언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증언을 들음으로, 들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다시 증언으로 이천 년 동안 전해져 온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뵈었던 이들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른 놀라운 계시를 바라거나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이며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부활 신앙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부활 신앙>      송영진 모세 신부

 

4월 11일의 복음 말씀을 보면, "믿지 않았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3)."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말을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믿지 않는 우리를 꾸짖으셨다. 우리는 지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고 그것을 증언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여자들의 말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말을 안 믿은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이어서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벗어나서 신자들에게 갔을 때 신자들이 안 믿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헤로데가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둔 일이 있습니다(사도 12,1-5).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갑니다(사도 12,6-11). 베드로가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자 하녀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신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사도 12,14). 그러자 사람들은 "너, 정신 나갔구나." 하면서 안 믿습니다(사도 12,15).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물증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증언'만 듣고 믿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이란 선택과 결단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돌아가신 것이 확실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였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다른, 또는 한 차원 높은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믿음은 사실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안 믿으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라는 분을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할 수는 있겠지만, 그분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끝까지 부활을 안 믿었다면, 그들은 그냥 그대로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새로 제자로 뽑아서 다시 시작하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일도, 복음서를 기록하는 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수난 전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존하고 전파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힘을 잃었을 것이고, 결국 몇몇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할 사람도, 믿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4월 11일의 복음 말씀만 보면, 제자들이 하도 안 믿어서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마르 16,14),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속마음과 계획을 잘 모르지만,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들의 믿음과 사랑이 사도들보다 앞서 있었거나, 또는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와 같은 이유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라고 명령하십니다. 믿는다면 믿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믿음을 능동적으로 증언하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믿는 이들의 사명    반영억신부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 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 르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이미지 모음2

 

제가 아는 분에게 전화번호를 하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송해 드린 전화번호는 다른 분의 전화번호였습니다. 뜻밖의 전화를 받은 분은 잘못 걸었다고 정중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게 전화번호를 전송받은 분은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이야기를 다시 하였습니다. 잘못된 전화를 받은 분은 다시금 본인은 세례명은 같지만 그 일과는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화를 하신 분은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전화를 받았던 저의 지인은 복음화 학교에서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마디가 전화를 잘못 받았던 자매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 자매님은 아이들도 다 자라고, 남편도 잘 해 주는데도 기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삶이 단조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생활이 바뀌고, 삶도 활력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전화번호를 잘못 전송해 준 저에게도 고마움의 표시로 예쁜 만년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시곤 합니다. 대녀가 참 많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신데,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저보다 훨씬 좋으십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시고, 이해 해 주시고,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화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던 나약한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담대하게 전하는 뜨거운 신앙인으로 변화였습니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에 태풍이 심하게 불어서 과수원의 사과들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과수원의 농부들은 모두 낙심하고, 걱정을 했는데, 한 농부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10%의 사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팔았다고 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사과그 사과는 10배의 가격을 더 붙여서 팔았습니다.

그해의 수험생들은 떨어지지 않는 사과를 비싼 가격에도 사서 먹었다고 합니다. 떨어진 90%의 사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았던 10%의 사과를 보았던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을 불어 넣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합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평범한 일들을 통해서 보통사람과는 달리 숙련된 솜씨를 보이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박스를 많이 들고 다니는 사람, 종이를 빨리 접는 사람, 단추를 많이 끼우는 사람, 청소를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하면서 남과는 다른 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무슨 달인이 되어야 할까를 생각합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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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4,20)

여러분은 말을 많이 하나요?
주장이 강한 편인가요?
분명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고 올바른 주장은 굽히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실제로 '보고 들은 것',
즉 직접 체험한 것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간접적으로 주워들은 것을 진실인 양 착각하고 그 주장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sns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심지어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것이 참다운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어떤 의도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한 것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만이
내가 올바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소위 '카더라 통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겠지요.

오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겠지만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것인지
카더라 통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식별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목격증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진실입니다.
그 목격증인들이 어떤 정치적 이유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증언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믿어서는 안되겠지요.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오상선바오로신부

 12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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