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두제자 (루카 24,13-35)

2015. 4. 8. 오전 7:46:28

글자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 (루카 24,13-35)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던 동안 하신 일들을 이어 간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셨듯이 그들도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쳐 준다. 그러나 이 치유를 보는 이들은 아직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내일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 이적을 설명해 줄 것이다' (사도행전 3,1-10).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 대하여 전해 준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시고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 뵙는다. ( 루카 24,13-35).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엠마오에서 제자들과 저녁식사를 하시다|가톨릭 성화(聖畵)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 대단히 아름다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지만 아직 부활하신 분을 만나지 못한 공동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시던 때처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현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공동체, 곧 부활 이후의 초기 교회 공동체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복음입니다.
엠마오 이야기는, 그런 공동체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깊은 충격과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무능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마음이 타오름을 느끼게 되었고, 빵을 떼어 주실 때에 그분을 알아 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십니다. 루카 복음에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전해 주는 이유는 예수님의 현존을 실감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이제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뵌 곳은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빵을 나누는 성체성사 안에서였습니다. 내 눈으로 예수님을 뵙지 못한다 해도 우리에게는 성경의 증언이 있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해가 저물 때 길을 걸어가야 하는 교회, 나그네처럼 시간을 걸으면서 영원과 천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교회가 늘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는 성경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면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송영진 모세 신부

4월 8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24장 13절-35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입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집으로) 간 것은 믿음과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믿음과 희망을 새로 얻고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서 멀어져 가던 두 제자를 돌려 세우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 실망감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침통한 표정'이라는 말과 '기대하였다.'는 말은 모두 그들의 실망과 낙담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두 제자에게 설명해 주십니다(루카 24,27). 아마도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 또 메시아가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메시아가 어떤 영광을 얻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두 제자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생긴 실망감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많이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실 때, 그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데(루카 24,31),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합니다(루카 24,33-35). (믿음은 증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몇 명을 제외하고 아마도 거의 대부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들에게만 '특혜'를 주신 것일까? 그것은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신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믿음과 희망을 완전히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믿고 있었던 예수님을 잃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포기하고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집으로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심정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낯선 나그네가 성경을 설명해 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그들의 심정을 나타냅니다.

또 그들은 여자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이미 들었는데(루카 24,22-24), 아마도 그 '소식'은 그들이 잡고 싶은 지푸라기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실망과 낙담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믿고 희망하고 기대할 수 있는 소식을 들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라고 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하셨는데, 굼뜬 것이 죄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이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믿는 데에 굼뜬 것과 아예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은 들으려고 노력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듣게 됩니다. 듣지 않으려고 하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냥 소음으로만 생각할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도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의 시간이 되지만,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을 떠나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이 여행은 혼자서 가는 여행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가는 여행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가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만 하고, 여행은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포기하면 그 인도와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이 여행은 '좁은 문'으로 가는 여행이기 때문에 결코 편안하고 쉬운 여행은 아닙니다(루카 13,24). 가다보면 힘든 일도 만나고, 어려운 일도 만납니다. 멈추고 싶을 때도 있고,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다른 길로 가는 경우도 생깁니다. 힘들다고 포기하면 그것으로 여행이 끝나버릴 것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힘은 히틀러와 그를 중심으로 한 나치당이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큰 책임이 있겠지만 당시 독일의 지성인이었던 에밀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마틴 니묄러((Emil Gustav Friedrich Martin Niemoeller, 1892~1984) 전쟁 고백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독일에 처음 나치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했습니다.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가톨릭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이야기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관심과 방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대사제, 헤로데, 빌라도의 잘못도 있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관심의 탓도 컸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대, 계층, 지역, 이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회복지, 교육, 빈부격차, 농촌, 어촌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거침없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 지구라는 푸른 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우리들은 잠시 이 아름다운 별에 머무는 것이고, 이 지구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야 할 생명의 터전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습니다. ‘주님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은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그들의 행동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관념에 머물 뿐입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다락방에만 머물렀다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락방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왔습니다. 이제 그들의 발은 주님의 발이 되었고, 그들의 손은 주님의 손이 되었고, 그들의 말은 복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그분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말씀에 귀 기우려라        반영억신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사도 3,6)

여러분은 부자이십니까?
대부분은 먹고사는 데 문제없을 정도면 다행이고,
아니면 이래저래 빚도 떠안고 살아가기도 하겠지요.

그러다보니 남에게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어줄 여력도 없지요?
그런 나 자신이 때론 비참하기도 하고 죄스럽기조차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남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물질로만 생각하면
제 같은 수도자는 여러분보다 더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저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고
그분의 말씀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말씀을 나눕니다.
저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니
수많은 이에게 돈보다도 더 귀한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줍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러분이 가진 것,
미소일 수도, 따뜻한 마음일 수도, 고운 말 한마디일 수도 있는
그것으로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그 작은 나눔 때문에
기뻐뛰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꿈꾸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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