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냐?” (마태 28,8-15)

2015. 4. 6. 오전 6:59:27

글자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2015. 4. 6. 월)(마태 28,8-15)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설교한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리라는 시편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선포한다(제1독서사도행전 2,14.22-3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을 떠나 부활 소식을 전하러 가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전하신다. 진정한 평화는 죽음의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시는 고귀한 선물이다.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다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다(복음마태오 28,8-15).     

 

시편 16(15),1-2ㄱ과 5.7-8.9-10.11(◎ 1)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평안하냐?”는 우리말로 하나의 질문입니다만, “안녕하세요!”처럼, 굳이 질문이라기보다는 단지 인사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의 원문인 그리스 말로는 “기뻐하여라!”라는 명령문입니다.

예수님 탄생 예고 당시 천사가 성모님께 한 인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스 말에서 이 단어 또한 평범한 인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람 말로 말씀하셨다면 “샬롬!”이라고 하셨겠지요. “평화!”입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히브리 말에서는 일상적인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인사는 더 온전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과 기다림의 실현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가 인용하는 시편 제16편은(화답송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께 피신하는 이를 죽음에서 지켜 주시고 그에게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리라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시편 저자는 아직 내세에 대해 분명히 알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늘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시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 믿음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 시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는 예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부활로써, 생명과 기쁨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여라!” “평화!” 하고 인사하실 때, 당신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기쁨과 평화가 이미 우리의 삶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의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부활 신앙>     송영진 모세 신부

4월 6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28장 8절-15절인데,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여자들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마태 28,8).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갑니다(마태 28,11).

아마도 당시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바쁘게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반대로, 당시의 경비병들은 사제들이 시킨 대로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서(마태 28,13) 바쁘게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쁜 소식'이 빠르게 퍼졌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헛소문이 빠르게 퍼졌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믿었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헛소문'을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점에서는 같은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비병들이 퍼뜨린 소문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해도,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양쪽 다 내세우는 것은 '증언'뿐입니다.

'기쁜 소식'과 헛소문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빈 무덤' 자체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고, 동시에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증거도 되지 못합니다. '빈 무덤'은 어떤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는 처음부터 죽은 것이 아니었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면, 부활한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다." 라고 증언해야만 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확인했다고 기록했고(요한 19,33-34),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백인대장과 빌라도가 공식 확인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마르 15,44).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사람은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입니다(요한 19,38-42). 그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지만 그것은 사적인 것이고, 빌라도가 확인한 것은 공적인 일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확인이 중요합니다.

제자들과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증언은 직접 경험한 일에 대한 증언입니다. 신학 이론도 아니고, 과학 이론도 아닙니다. 체험입니다. '언제, 어떻게' 부활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언제, 어떻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들이 직접 만났다는 것만 증언했을 뿐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조직적으로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집단 환각 같은 것에 빠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한 다음에 그 말이 참말이라고 주장하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단 환각이라고 해도, 그런 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긴 세월 동안...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제자들의 증언을 믿는 것인데, 단순히 증언 때문만은 아니고, 제자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말은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답게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평소의 '삶'도, 그리고 마지막에 죽는 모습도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과 죽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들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살다가 죽는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열심히 선교활동을 해도 '삶'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만 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신학교에서 성주간 피정을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제가 먹고, 기도하고, 공부한 못자리입니다. 신학교에서의 피정은 다른 곳에서의 피정과 달리 그리움과 편안함이 함께 있어서 좋습니다. 늘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좀 더 기도하고, 공부하였을 것 같습니다.

이번 피정 중에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매일 강론을 하던 제가 강론을 들으니 새로웠습니다. 신부님들의 말씀은 봄날의 햇볕처럼 제 마음을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분은 똑똑하고, 유능한 율법학자를 바라보지 않고 무식하고 능력 없는 어부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기도할 때조차도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건강하고, 잘 살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아이에게 내 주면서도 행복해 하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냄새나는 기저귀를 갈면서도 엄마는 환하게 웃습니다. 자신의 배설물조차도 치우지 못하는 무력한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눈빛입니다.’ 강론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제게 선명하게 다가 왔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종교적으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입니다. 육체라는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에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 역시 죽음이 끝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생명활동이 멈추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생존과 번식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살아 있는 것들과의 단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이별이고, 슬픔이며, 고독한 것입니다.

인문학적으로 죽음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감입니다. 절대주의는 상대주의로, 상대주의는 회의주로 넘어갑니다. 고전은 낭만으로, 낭만은 인상으로 넘어갑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넘어갑니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코, 로코코, 현대 건축으로 넘어갑니다. 같은 죽음이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달리 말하면 침묵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평화는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시작합니다.

평화를 얻고 싶으시다면 봉사하십시오. 봉사의 기쁨을 알고 싶으면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려면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기도의 샘물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침묵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쉽고, 야속하고, 화가 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믿었던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돈은 사람을 움직인다   반영억신부


선거철에 나타나는 색깔은 생색이랍니다. 자기의 잇속을 챙기느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기를 드러내고자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재보궐 선거에 소신을 버리고 자기가 최고라고 뻔뻔함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기다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이고 진흙탕 속을 헤매기도 합니다. 국회의원, 공직자, 대기업 회장, 군 장성 등등 물질 때문에 모든 명예를 한 순간에 잃는 이들이 많습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증거 되었습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부활의 첫 메시지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시작된 곳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배운 곳입니다.
또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무시당했던 변방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만났던 곳으로 다시 가라고 하십니다.
가장 소외되고 아픔이 서려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부활을 맞이하며
교회 각 공동체는 소위 '엠마오' 행사들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자는 것이지 놀러 가자는 것은 아닐진대
그렇게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전국 각지에서 '팽목항'으로 모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곳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을 만나서 벅찬 감동을 느꼈던 그때를 돌아보십시오.

부활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형제들이여, 다시 시작합시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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