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요한 3,16-21)

2015. 4. 15. 오전 7: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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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요한 3,16-21)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가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점점 성장하자, 대사제와 사두가이들이 함께 나서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밤에 주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어 주고 사도들에게 성전에서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 백성을 가르친다. 무엇으로도 막거나 제압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이 사도들에게서 드러난다(사도행전 5,17-26).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어둠 속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한 3,16-21).     

시편 34(33),2-3.4-5.6-7.8-9(◎ 7ㄱ)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의 극치(0914)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사도 5,26). 독서의 이 마지막 한마디가 눈길을 끕니다. 지도층의 태도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과 크게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당신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11,8 참조). 스테파노도 돌에 맞아 순교했고(사도 7,57-60 참조), 바오로도 돌을 맞았습니다(사도 14,19 참조).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돌에 맞지 않으려고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독서에서도 사도들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밖에 나와 다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또한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사도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반면, 막강한 공권력과 힘을 가진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반대의 표적이 될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싶었지만 사도들에게 치유받은 병자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바쳐 가면서 지켜야 할 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처신의 이유와 동기는 시기심이었지(사도 5,17 참조)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관계없이, 복음 선포가 나에게 도움이 되건 손해가 되건 상관없이 진리는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헤아리는 사람은 이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은 “이것이 안전한 길인가?” 묻지 않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물으면서 행동합니다.     

 

 

 

<빛과 어둠>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원래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는(멸망해야 하는) 존재이다(창세 3,19).  2.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멸망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3.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4.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5.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이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믿기만 하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믿음을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마태 7,21). "심판을 받지 않는다." 라는 말은 심판 자체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했다."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 3,19)."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을 설명하신 말씀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어둠인데도(악인데도) 상관하지 않고 그것만 찾고, 그것만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양심을 따르지 않고 욕망만 따르는 자들이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악인데도 욕망만 따라가는 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 우리가 욕망을 채우면서 쾌락을 즐길 때, '양심'은 "그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라고 경고하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럴 때에 회개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죄를 더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무시하다가 양심이 마비되거나, 아예 양심 자체가 없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예언자가 회개하라고 말할 때,그 말을 듣고 자기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사람도 있고, 듣기 싫다고 그 예언자를 죽여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예언자를 죽여 버린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입니다(마르 6,17-29).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감추려고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비판한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회개했다면, 그들은 용서를 받았을 것이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를 선택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해서 스스로 심판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면  더 이상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시비를 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헤로데와 헤로디아 같은 권력자들의 죄를 비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예언자의 입을 막을 생각만 하고, 자기들이 받게 될 심판은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와 헤로디아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양심적인 시민들과 언론을 탄압하는 독재자들이 좋은 예입니다. 정권을 비판하는 말을 모두 막아버리면 조용해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 뿐입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폐차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어둠을 거부하고 빛을 선택하는 사람은  방해를 받을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는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려는 것이다."가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 일이 빛이었음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예수님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너희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빛과 어둠 가운데에서, 양심과 욕망 가운데에서 무엇을 따라가고 싶으냐?"

 

부활 2주간 수요일 (요한 3,16-21)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라파엘 신부

 

저는 사제 수품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할 성경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제가 도움을 주고 있는 복음화 학교가 새로이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가톨릭 회관 5층에 새로이 강의실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일반 건물에서 세를 얻어서 지냈습니다. 올해는 복음화 학교가 시작된 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명동의 가톨릭 회관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복음화 학교가 더 많은 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단체가 25년을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단계의 과정을 마치려면 16개월가량 매주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분들이 만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도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복음화 학교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지난 3월 한국의 주교님들께서 교황님을 방문하였을 때, 교황님께서는 한국교회에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죽음 위에 세워졌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장은 모두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하는 기도가 적어지고 있으며, 다른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신앙이 삶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복음화 학교는 신앙은 실천이며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임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평신도들의 열정을 존중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자들의 권위와 독선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자들은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사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을 충실하게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서 성사를 집전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직책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평신도들이 25년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을 격려하셨고, 치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복음화 학교가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을 본받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더욱 충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20)

세상의 많은 범죄는 주로 밤에 일어납니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요 재충전의 시간인데 밤은 악이 활동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밤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하지만 왜 진실이 밝히 드러날 수 없는 걸까요?
악을 저지른 어둠의 자식들이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어둠의 세력에 동조하여 진실을 그냥 묻어버리자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더이상 어두운 무덤 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요즘 날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빛이 나기를 빕니다.
그 빛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어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길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지요?
빛의 자녀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상선바오로 신부

 

부활 2주 수요일  2015 - 04 -15

김오석 라이문도 신부님(일산 주엽 성당)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0-21)

 

빛과 어둠의 경계선은 결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여기 빛이 있고 저기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은 어둠을 향하여 있고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어둠이다.

백퍼센트 진공이 불가능하듯이 순전한 어둠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빛으로 충만하고 빛은 언제나 어둠 속에 있다.

그러나 빛이 곧 어둠은 아니다.

빛은 빛이요 어둠은 어둠이다.

빛과 어둠은 둘도 아니면서 하나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빛이요 무엇이 어둠인가?

하늘을 향하는 것이 빛이요, 자기를 보는 것이 어둠이다.

하나 됨을 보는 것이 빛이요, 분열을 보는 것이 어둠이다.

빛이냐 어둠이냐를 가르는 것은 방향이다.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가가 문제다.

 

가로등을 향하여 밤길을 걷는다,

가로등이 앞에 있는 동안 길은 환하다.

뒤돌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뒤에는 그림자(어둠)가 따르고 있다.

가로등에서 멀수록 그림자는 크고 가까울수록 작아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로등 빛이 정수리에 쏟아질 때 길은 가장 밝고,

그림자는 몸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어둠은 없다.

북극점에 서면 모든 방향이 남쪽이듯이 빛을 정수리에 받아 자신의 그림자를 삼켜버리면,

문득 사방이 밝음뿐이다.

이제 가로등을 등지고 걷는다.

빛을 등지는 순간 앞에는 그림자가 생기고 빛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림자(어둠)는 커진다.

다음 가로등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림자는 자꾸자꾸 커지고 마침내 몸까지 어둠이 삼켜버리고 만다.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는 그 빛으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에 있다 해도 이미 빛 속에 있는 자요,

빛을 등진 자는 그 빛으로부터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다 해도 이미 어둠에 속한 자다.

그런즉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방향'이다.

우주는 빛과 어둠의 공존이지만, 그러나 둘의 혼합은 결코 아니다.

우주는 빛이거나 아니면 어둠일 뿐, 두루뭉수리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스름 회색지대는 없다.

우주가 나에게 빛이냐 어둠이냐를 결정짓는 문제는 내가 선택한 방향이다.

 

나는 지금 빛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빛을 등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 세상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의 절정이다.

그분은 결코 심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받게 하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결코 심판자는 아니지만,

빛이신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세상을 심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빛은 사물과 만나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빛인가 사물인가?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예수인가? 세상인가?

인간을 지옥에 보내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이다.

끊임없이 빛을 등지고 살아간다면 말이다.

빛을 향하여 사는 날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이미 그 사람 안에 있으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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