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금요일>오천 명을 먹이시다(요한 6,1-15)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사도들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유다인들의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지혜로운 제안을 한다. 사도들이 하는 일이 사람에게서 비롯되었으면 얼마 안 가서 사라질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박해한답시고 제압할 수도 없을뿐더러 없애지도 못하리라는 것이다. 최고 의회는 그 말에 수긍한다. 교회의 역사는 가말리엘의 말이 옳았음을 보여 줄 것이다(사도행전. 5,34-42제).
오늘부터 요한 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시작된다. 오늘 복음은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고 구체적인 시기를 알려 주는데,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심으로써 이제 새로운 파스카가 이루어지는 것을 암시한다(요한 6,1-15).
시편
27(26),1.4.13-14(◎ 4ㄱㄹ)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오천 명을 먹이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4월 17일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6장 1절-15절, '오천 명을 먹이시다.'인데,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겉으로는 같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몇 가지 차이가 있고, 그리고 이야기의 강조점도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요한 6,5), 당신이 먼저 기적을 행하실 준비를 하십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사람들을 해산시켜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제자들이 먼저 군중의 배고픔을 걱정합니다(마르 6,35-36).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라고 물으십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배고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행하신 기적이 아니라,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기적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한 기적이고, 기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행하신 기적입니다.
(공관복음에 있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들이 스스로 하면 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느님께 청하면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람들이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6,14-15). 공관복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말만 있고, 사람들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냥 흩어져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좀 더 강조하고 있고, 그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을 6장 전체에 걸쳐서 길게 기록했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기적 자체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기적을 전하면서도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관점'의 차이이고, '해석'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구원 등은 희망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희망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진짜로 기다린 것은 자기들에게 세속적인 행복을 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이 이야기의 첫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요한 6,3)."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빵의 기적'을 행하신 곳은 풀밭입니다(요한 6,10). 처음에는 '산'에 계셨는데,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풀밭'으로 내려오셨고,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자 '다시 산으로' 가셨습니다. (산에서 풀밭으로 내려오신 모습은 목자가 되어 주려고 오신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목자를 거부했고, 예수님께 세속적인 정치 지도자가 되라고 요구했습니다.)
또 처음에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다시 산으로 가실 때에는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가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과 함께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혼자서 다시 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신(마르 1,45)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버리신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것은 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바라는 것만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산'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혼자서 다시 산으로 가신 일은 메시아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10)"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임금이 되라고 요구한 사람들은 빵을 주어도 그것을 거부하고 돌을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이고, 생선을 주어도 그것을 거부하고 뱀을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종교를 찾는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왜 예수님을 믿는지... 지금 우리의 시선이 하느님 나라를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만 향하고 있는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마르코복음에 있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보면,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3)." 라고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고향집'으로 데리고 가시는 분이고, 중간에 지쳐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계속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바로 그 '힘'을 주기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몸의 배고픔만 해결해 주는 세속적인 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저 세상'은 안 보고 '이 세상'만 본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독서에서
가말리엘이 제안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활동 전체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의 입을 빌려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가말리엘이 이렇게 충고하는 것은 그동안 백성을
선동하던 테우다스나 갈릴래아 사람 유다와 같은 이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는데도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두려움 없이 그분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교회 역사가 입증하듯이, 요한을 제외한 사도들은 모두 순교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도 박해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신앙은 오히려 들불처럼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비롯하여 박해로
신자들이 쫓겨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은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더욱이
그의 말이 옳았다면, 이 모든 일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날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인 공생활 중에 빵을 많게 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분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 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자기들이 선포하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안”(필리 3,10) 이들이었습니다. 부활의 힘을 아는 이만이 고난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을 알았기에 박해와 죽음이 그들의 신앙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백성을
측은히 여기시어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는데, 이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를 통하여 예수님의 위대한 기적의 힘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안드레아 사도처럼 최선을 다해 주님을 도와 드리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오늘 복음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교황청에서 ‘강론지침’이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한국어로 출판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읽어 보았습니다. 강론은 화려한 언변, 웅대한 연설, 언어의 기교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강론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중에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강론은 그 말씀을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보여줄 때, 더욱 깊은 감동을 준다고 말을 합니다. 강론은 일반 연설이나 강의와는 달라서 전례의 한 부분이며, 무엇보다 말씀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강론을 하는 성직자는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에게 내과 수술을 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성직자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오랜 전승과 가르침에 부합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강론 준비의 4가지 단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는 비단 강론은 하지 않더라도 매일 성서 말씀을 통해서 삶을 성찰하고, 변화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읽기(Lectio)입니다. 성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묵상(Meditatio)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좋은 영화를 보면 내 안에 감동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 번째는 기도(Oratio)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나 자신의 변화를 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내 안에 갇혀 있는 마음을 가족과 이웃들에게 열어 놓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관상(Contemplatio)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함께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관상은 행동으로 드러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과 폭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나눔과 사랑으로는 충분히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 땅을 녹이고, 파란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봄 햇살이면 충분합니다.
조재형 신부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요한 6,11)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기적사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적에 속합니다.
그래서인지이 기적을 체험한 후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지요.
그런데 이 기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의 사람들을 먹였다는 것일까요?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이 기적을 이루셨을까요?
감사와 나눔을 통해서 이루신 기적입니다.
빵 한조각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콩 하나도 나누어 먹으려는 자세가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여러분은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감사드리며 먹나요?
행여 반찬투정은 많이 하지 않나요?
어떤 음식이든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은 더 나누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정말 우리 몸에 좋은 보약은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시는 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먹게 될 음식 깊이 감사하며 먹고 나눕시다.
그때 여러분도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 신부
부활2주간 금요일(요한6,1-15)
믿고 감사하라 반영억신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김오석 라이문도 신부님(일산 주엽 성당)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5천명 쯤 되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는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
필립보는 많은 군중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치 않다며 걱정을 하였고, 안드레아는 간신히 찾아낸 어떤 아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현재의 소유에 대해 회의와 의심 그리고 좌절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계산하는데 재빠른 필립보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머리 속에 수 많은 숫자를 대입하여 현실의 문제를 재단하고 걱정하고 포기하고 결국 이기적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본다. 안드레아의 말 속에서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삶 가운데 널려있는 결핍과 어려움에만 집중하여 신세 한탄에만 열중하는 믿음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과 불평을 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의 보잘 것 없음에 좌절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심과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본다. 가지고 있는 현재의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늘 마음속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다.
참으로 소중한 삶의 가치는 현재 내게 주어진 그 모든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하여 감사를 드림에 있다. 거기서 부터 삶은 시작되고 그렇게 시작된 삶은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희망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이 된다.
어차피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부족함과 결핍을 바라보며 의심과 불안, 한탄과 좌절로 시간을 허비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의 보잘 것 없음조차 감사하며, 바로 거기에서부터 힘찬 한걸음을 내딛을 것인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