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토요일>물 위를 걸으시다 (요한 6,16-21)
이제 사도행전은 교회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전해 준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홀대받았기 때문이다. 초기 공동체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이들을 뽑아 식탁 봉사를 맡기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스테파노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났다(사도행전 6,1-7).
요한 복음에서, 빵을 많게 하시는 표징이 있은 다음 제자들이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가신다. “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라는 것이다(요한 6,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물 위를 걸으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4월 18일의 복음 말씀은 '물 위를 걸으시다(요한 6,16-21).'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사실을 전하는 기록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체험했고,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실 때(마르 1,25-26) 예수님의 '권한'을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모하셨을 때(마르 9,2)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지금 말한 '권한, 영광, 권능'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 영광, 권능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제자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고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체험과 믿음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신앙 고백을 맨 앞에 적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에 관한 기록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고백을 설명하기 위한 '증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고(마르 3,15),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요한 20,23). 또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요한 17,22). 그러나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한 일들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일들이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제자들 자신들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신 일도 완전히 주신 일이 아니라 당신의 권한을 위임해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뜻이 아닌 일에는 그 권한을 제자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물 위를 걸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 사도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마태 14,28).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자기도 물 위를 걷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능력'을 요청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허락하셨는데(마태 14,29), 그에게 물 위를 걷는 능력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워져서 물에 빠졌고,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마태 14,29-30).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그를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4,31).
여기서 '의심'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예수님만 믿었어야 했는데 거센 바람을 보고 그 믿음이 흔들린 것. 2. 아무런 필요도, 이유도 없는데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가고 싶어 한 것. 예수님을 믿는다면, 물 위를 걸어가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배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어야 했다는 것.
사도행전을 보면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돈으로' 사도직을 사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사도 8,18-19). 또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몇몇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흉내 내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했다가 마귀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사도 19,13-16).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뭔가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도 사도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절박하고 딱한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도와주고 싶어서, 또는 교회의 어떤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어서... 등등, 정말로 순수한 동기로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많은 경우에 그것은 사탄의 유혹일 가능성이 큽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은(마태 17,20) 믿기만 하면 초능력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당신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초능력이 생기기를 바라지 말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우리에게 사용하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시는 '예수님'입니다. 물 위를 걸어서 오시든지 하늘을 날아서 오시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일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방식'을 보고 놀랐지만, 부활 후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오셨든지 간에 자기들에게 오셨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 근심, 걱정, 고통은 우리 앞에 놓인 커다란 숙제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주님! 제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도록 용기를 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초대교회는 공동체가 커지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식량 배급에서 소외되는 문제,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문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박해의 칼날이 있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성령께 의지하면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저도 제 앞에 놓인 일들 때문에 걱정을 하곤 합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평화방송 녹화가 있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 먹은 것이 체한 것처럼 가슴 한쪽이 답답했습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떨리고, 녹화를 잘 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녹화를 잘 마쳤고,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26일에 있을 성소주일 행사도 그렇습니다.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사람들은 많이 오면 좋을 텐데, 장비는 잘 설치되어야 할 텐데, 신학생들이 프로그램을 잘 운영해야 할 텐데 하면서 걱정을 합니다. 이 또한 다 지나갈 일인데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 근심, 두려움은 사실 90%는 생기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들 때문에 오늘 마음의 상처를 더 키우기도 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이 날아가기도 합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살면서 근심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갈등이 우리 주변을 맴돌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다. 두려워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겼고, 그래서 많은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할 시간에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나다.’라는 표현이 사도행전에는 세 번 나오는데(6,7; 12,24; 19,20), 이것이 오늘 독서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핵심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나도록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입니다. 신자 수가 늘어나는 것도, 사도들이 대단한 순교자가 되고 성인이 되는 것도 사도행전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아닙니다.
과부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이고 공동체 친교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식량을 배급하는 이들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나면 형제애와 친교도 자라나고, 과부들에 대한 돌봄도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식량 배급에 전념한다고 또는 본당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평일 미사에 열심히 참여한다고 해서 꼭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느 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어느 정도 그 말씀에 따라 이루어지는지가 참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사람들이 당신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 하자 산으로 피해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지켜보시며 사랑의 눈길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역풍에 시달리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지만 그분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면서 그들을 역경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저희의 피난처, 위로자, 친구이신 주님, 늘 저희와 함께하소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 항해(航海)-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을 대하는 순간 주저없이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오늘 인생항해 중인 믿는 모든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의식하든 못하든 두려움과 불안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워서, 불안하여 사람입니다. 우리의 원초적 정서와 같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세상에 두려움 없는 사람, 불안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성서에 365회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1년 365일 매일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위 구절은 우리 요셉수도원의 십자로 중앙 예수부활상 앞 돌판에 새겨져 있는 글귀입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원래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구절도 생각했습니다만 수도형제들 대다수가 위 구절을 원했습니다.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참 좋은 복음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나다(I AM)' 바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힘을, 현존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여 '나다'는 '너희와 함께'와 연결될 때(I AM with you), 또 '너희를 위해'란 말이 연결될 때(I AM for you) 비로소 하느님의 진면목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막연히 그냥 현존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다(I AM)'는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라는 의미가 함축된 은혜로운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인생항해를 상징합니다. '세상의 바다' '세월의 바다'를 항해중인 제자들이 탄 공동체란 배입니다.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어나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의 공동체란 배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호수위를 걸어 오시며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셔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들일 때 안전항해의 기적입니다. 세상 바다를 항해하면서 얼마나 많은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배들이 파선됐는지요. 우리 역시 지금까지 인생항해도중 파선될뻔한 위기는 얼마나 많았던지요.
여기 요셉수도원도 설립 29년째 이고 제가 파견받아 온지 28년째인데 그동안 파선의 위기도 많았고 떠난 형제들도 많았지만 주님이 늘 선장이 되시어 인도해주셨기에 지금도 계속 안전 항해 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느 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닿아 있었다'는 묘사대로 지난 세월의 항해가 꿈처럼 금방이라는 느낌이니 이 또한 은총의 기적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오늘 분열로 인해 파선 직전의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공동체란 배를 복원시켜 일치를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들을 통해 기민하게 지혜롭게 개입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하여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기도와 안수로 이들에게 식탁 봉사를 맡기고, 자기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니 비로소 역할 분담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안정과 평화를 찾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정말 인생항해 중 무섭고 두려운 것은 외적 풍랑이기 보다는 분열로 인한 내적 풍랑입니다.사실 주님을 중심으로 내적 일치와 평화를 이룬 견고한 개인이나 공동체는 외적 풍랑을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친히 인생항해중인 우리 공동체 배의 선장이 되시어 안팎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느님의 목적지까지 무사히 인도해 주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시편33,18-19).
아멘.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 6,4)
어떤 조직이라도 커지게 되면 여러가지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소규모일 경우에는 뜻을 같이 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에
큰 규모의 조직보다는 갈등이 적은 편이지요.
여러분이 속해 있는 단체나 조직은 어떤가요?
교회라는 조직도 비슷하겠지요.
대형교회 일수록 문제가 많지요.
남들이 보기엔 크고 멋진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실제로 개척교회나 시골공소같은 작은 공동체들이
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친교 가운데 살아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갈등해소를 위해서는
가능하면 소공동체로 조직을 나누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무작정 작게 나눈다고 꼭 좋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 조직을 이끌어갈 일꾼들이 있어야겠지요.
본당신부나 담임목사, 주지 스님...
조직과 단체의 장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고
나머지 봉사는 신도들 중에 혹은 조직원들 중에
지혜와 성령, 신망이 두터운 사람들을 협력자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쇄신이 더딘 이유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기도와 말씀봉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못 만들고 있기 때문이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고 신망이 두터운 평신도들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는 말씀봉사는 쬐끔하는 편인데 기도에는 충실치 못하니 교회쇄신의 죄인입니다.
그리고 멋진 평신도들을 키워내지도 못하고 협력자로 잘 쓸 줄도 모르니 더 큰 죄인입니다.
죄송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