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목요일] 나를 보내신 분 (요한 13,16-20)
선교 여행을 떠난 바오로 일행은 페르게를 지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른다. 어느 곳에 가든지 그들은 먼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구약 성경을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증언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그가 먼저 찾아간 유다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3,13-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이 종으로서, 파견된 이로서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다면 행복할 것이다. (요한복음 13,16-20)
시편
89(88),2-3.21-22.25와 27(◎ 2ㄱ 참조)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
○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니, 내 이름으로 그의 뿔이
높이 들리리라.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냉대한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된다면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팔아먹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을 버렸고, 유다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분의 종이며 제자인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요? 제자가
할 일은 파견받은 이로서, 종으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다하고 그다음에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과나 반응에 대해서는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고 덮어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실천하면 행복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실패에 좌절하거나 부정적 반응에
기가 꺾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반대로,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환호 때문에 자기 자리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견을 받은 제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파견된 이>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에 하신 말씀이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라는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가 맡긴 임무만 정확하게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종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종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종과 같은 위치로 낮춘 사람들입니다. 또 복음을 선포하라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본받으라고 가르쳐 주신 일들을 그대로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뭔가를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은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더 쉬운 길도 없고, 더 좋은 길도 없습니다. 더 어렵고 더 힘든 길도 없습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원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길은 '내가' 구원을 받는 길이고,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고, 행복한 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길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파견된 이'에게 '임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무 수행에 필요한 '힘'도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라는 말씀은, 그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신앙인들)에게 일을 시키기만 하시고, 아무런 도움도 안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일을 시킬 때에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한 힘도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일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도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인데, 예수님은 그런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할 때, 그 일은 겉으로는 '내가' 내 사랑으로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이웃을 통해서 사랑을 주시는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때에도, 겉으로는 '내가' 내 힘으로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힘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악과 맞서 싸우는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나를 거부하는 것이고, 나를 거부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교회를, 또 신앙인을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교회가, 또 신앙인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트집을 잡고, 박해를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도 역시 예수님을, 또 하느님을 박해하는 짓입니다. 외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그럴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런 경고도 하셨습니다. "...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박해를 받는 쪽에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박해를 하는 쪽에서도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누가 진짜로 하느님과 예수님 편에 서 있는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은 없고 미움만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은 항상 '사랑으로' 일해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도, 악과 맞서 싸울 때에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할 때에도 항상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증오하고 박해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랑은 없고 증오심만 있는 종교라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증오심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매달 마지막 월요일은 동창 신부님 모임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나듯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82년에 신학교에서 처음 만났으니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교구청에 있으니, 교구의 정책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도, 제 이야기 중에서 보수적인 느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친구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친구들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교회는 세상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권위가 있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던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능력과 표징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오셨다고 하신 분이십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모래위에 지어진 집과 같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여러분의 이웃을 여러분의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윤리에는 의무론과 목적론이 있다고 합니다. 십계명은 의무론일 것입니다. 살인하면 안 되고, 도둑질 하면 안 되고, 남의 아내를 탐하면 안 되고,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타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이것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버스를 운전하면 그 사람을 버스에서 내리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목적론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희생을 해서 여러 사람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목적론 일 것입니다. 다만 목적론은 사람도, 가치도 계산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어제의 말씀과 중첩되게 제게는 다가옵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다음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다시 잘못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언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은총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우리의 부족함도 우리의 허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허물을 씻어내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을 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내가 만나는 분들을 주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우리들의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옛날에는 사신이라는 제도가 있어
임금이 자신을 대신해서 다른 나라의 사절로 보내면
그 나라는 그 사신을 임금 대하듯 하였습니다.
우리 수도회도
총시찰자 제도가 있어 총장을 대리해서 관구를 시찰하게 된다.
시찰자는 총장의 예우를 받습니다.
오늘날엔 대통령이
특사를 파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기는 거의 불가능 할 겁니다.
대통령도 직접 보기가 힘드는데 하느님을 그리 쉽게 뵐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나는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하느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다고 섭섭해할 일은 아닙니다.
간혹 난 하느님을 뵈었다고 하는 사람은 착각을 하던가
아니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럼 하느님을 어떻게 뵈올 수 있을까요?
그 대리자요 특사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뵈올 수 있답니다.
그럼 예수님은요...?
그건 예수님의 대리자요 사절을 통해서 뵈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직자, 수도자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사절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가짜 사절도 많답니다.
예수님의 사절은 대부분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참 예수님의 사절이 누구인지 한번 찾아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를 파견하신 하느님도 만나게 됩니다.
그 기쁨을 누리는 오늘 되소서~~^^
오상선바오로 신부
비오5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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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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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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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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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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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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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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