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수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요한 12,44-50)
4.29 카타리나축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소녀 시절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신비 체험을 모아 책으로 남긴 그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가타리나 성녀는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사도행전의 후반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을 전해 준다. 오늘 독서는 그 첫 부분으로서,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파견하는 장면이다. 이 둘은 성령께서 일을 맡기시려고 따로 세우신 이들이다. (사도행전 12,24─13,5ㄱ)
오늘의 말씀으로 요한 복음의 전반부를 끝맺는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여러 표징을 보여 주시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구원을 얻는다. (요한 12,44-50)
시편 67(66),2-3.5.6과 8(◎ 4 참조)
◎ 하느님,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당신의 길을 세상이 알고, 당신의 구원을 만민이 알게 하소서. ◎
○ 당신이 민족들을 올바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겨레들을 이끄시니, 겨레들이 기뻐하고 환호하리이다. ◎
○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요한 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나는 사랑이다 반영억 신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바르나바사도
사도행전이 이제 전환점을 맞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이제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바오로 사도가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사도행전 후반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과 마지막에 그가 수인으로서 로마에 도착하는 것까지를 전해 줍니다.
그 선교 활동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점점 자라나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사도행전이 바오로 사도의 죽음이나 순교로 마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던 로마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지, 바오로 사도의 전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 어느 부분에도 바오로 사도가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파견을 받은 사람이 바르나바와 바오로라는 사실보다 그들을 파견하신 분이 성령이시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강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파견받은 이는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명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파견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자기 말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다면, 아울러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한다면 그는 하느님과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하느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하느님을 보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냥 '내가 바로 하느님이다.' 라고 선언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복잡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아마도 이것은 삼위일체와 관련된 표현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지만, 아버지와 아드님으로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꿔서 복음서에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이 끝부분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설명하고 고백하는 내용이 기본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뒤의 14장에 다시 나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9)"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빛'은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머무르는 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이라는 말은 원래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신 시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 죽은 다음에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앞에서 받게 되는 심판을 죽은 뒤의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심판은 이미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7-48)."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 구원을 거부하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그 선택이 바로 심판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사는지, 아니면 안 받아들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지, 지금의 선택과 삶 자체가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닥치는 날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서 지금도 진행 중인 날이고, 언젠가 마무리되고 완성되는 날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은 '지금'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자신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확인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이 지금 당장에는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 당장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 있고, 지금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생이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국회의원 ‘재, 보궐’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서울, 성남, 김포, 광주에서 임기 1년이 남는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됩니다. 국회의원은 후보자의 인격, 능력, 지역에서의 삶을 보기 보다는 후보자가 소속된 당을 보고 투표를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정당정치를 하고 있으며, 정당의 정책과 이념에 따라서 국가의 방향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해당된 지역의 유권자들은 소중한 한 표를 신중하게 행사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나라의 수준은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보수와 진보를 이야기 합니다. 보수와 진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등장한 이념입니다. 보수는 기업과 경영자들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규제를 풀고, 세금을 적게 거두려고 합니다.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래야 국가의 경쟁력이 커지고, 산업이 발전해서 일자리가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많은 규제를 두려합니다. 기업은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 할 수 없고, 최저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정부는 많이 거둔 세금으로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시킵니다. 이런 방향은 기업들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국민들은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어들면 보수의 손을 들어 줍니다. 반면에 노동자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노동의 결실이 소수의 기업에게만 편중된다면 진보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밀물과 썰물이 있어야 바다가 정화되듯이 한 국가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갑니다.
대한민국은 보수가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입과 귀가 되어주는 언론과 방송이 보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보수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념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보가 추구하는 통일, 화해, 평화는 한국전쟁을 체험한 세대에게는 공산주의와 함께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언론의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에 교회가 갇히면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 역시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 속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종북 사제 100인의 명단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국가의 정책과 방향에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프레임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에서는 성모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모님께서 하신 말씀을 교회와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샘물을 통해서 사람들이 치유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니까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굳게 하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신앙의 조건이 아니라, 신앙의 결과에 따라서 표징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크게 4가지 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굳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에 바르지 않아도 되는 것들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기적의 표징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영혼의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오염된 우리들의 마음을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성체성사에 자주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입니다. 미사의 힘은 그 어떤 샘물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미사에 자주, 온전히 참여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성지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 휠체어를 기쁜 마음으로 밀어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희망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망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모습입니다. 소망과 욕망의 공통점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욕망은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죄의 굴레에 떨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소망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소망은 절망 중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루르드 성모님 성지에 물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5장 1 – 9절의 이야기입니다. ‘벳자다 연못’의 이야기입니다. 연못이 출렁거릴 때 연못에 몸을 담그면 기적적으로 몸이 치유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못의 주변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않아 누워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그렇게 오래 지낸 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하고 싶으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샘물을 마시고, 병에 담아가면서도 그 옆에 있던 성경 말씀은 읽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샘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고, 주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사도 13,2)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함께 일해야 할 때가 있는가하면 따로 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함께 일하면 내편인 것 같고
따로 다른 데서 다른 사람과 일하면 내편이 아닌 듯이 여길 때도 있지요.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니편 내편 편가르기를 하기도 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두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뭔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결국 서로 갈라서고 맙니다.
그런데 그게 복음화의 폭을 크게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습니다.
때론 누군가와 서로 싸우고 헤어져도
그 때문에 원수처럼 이를 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갈라 세움으로써 더 필요한 은총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자 하신다 여기면 됩니다.
오늘 나와 잘 지내다
지금은 갈라선 그 사람을 한번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잠시 기도합시다.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큰 일을 이루었듯이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