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살과 피 (요한 6,52-59)

2015. 4. 24. 오전 6: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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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살과 피 (요한 6,52-59)

바울의 회심

 바오로의 회심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던 사울이 신자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내려가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사도행전 9,1-20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의 끝 부분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시라는 말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몹시 거북하게 여기며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요한 6,52-59)    

 

 시편 117(116),1.2ㄱㄴ(◎ 마르 16,15 참조)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스크랩( 아오스딩 수사)-그리스도 성체성혈 대축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다마스커스의 사도바울 회심교회에서
바오로의 회심

어떤 일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리저리 재 보고 나서,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누가 사울을 데려오자고 했다면 아마 모두가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사울은 사도 8,1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는 살기를 내뿜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신자들은 쉽게 그를 신뢰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박해자였던 그가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셨을 때 하나니아스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가거라.” 하시니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울이 안수를 받을 만하다고 판단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이렇게 선택되었습니다. 사도들도, 하나니아스도, 신자들의 공동체도 그를 선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그 선택은 분명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선택과 결정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된 일들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처음부터 인간의 결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바오로는 회개하여 새사람이 된 다음,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전부이며 그분을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필리 3,8 참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현세라는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주님의 몸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자기희생의 길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그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듯이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도 새롭게 변해야 할 것입니다.     

5월25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성 베다 사제 학자/성 그레고리오 7

<나를 먹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예수님께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이해한 척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해한 척 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모두 예수님 말씀을 안 믿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다툰 것입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예수님 말씀은 믿어야 할 말씀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다투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다투고 싸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학문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또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3-56)."

이 말씀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라는 말씀과 비슷한데, 두 말씀이 같은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말씀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먹는 것'과 '믿는 것'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예수님을 먹는 일도, 예수님을 믿는 일도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이 그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같은 일인데, 믿는다는 말은 먹는다는 말보다는 거리감이 있는 표현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내가 분리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다는 말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내가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완전히 들어오셔서 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먹는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우리는 믿는 것과 먹는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먹는 사람'은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먹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먹는 일을 막연히 생각으로만, 또는 마음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또는 상징적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실제적인 일이 될 수 있도록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먹는 일은 상징적인 일이기도 하고, 실제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성체는 상징이기도 하고, 실제이기도 합니다. 성체를 먹어서 얻게 되는 '생명'은 실제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예수님을 믿는(먹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서 그 생명력으로 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먹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은 원래 '한처음부터' 하나이기 때문에 믿는 일도, 먹는 일도 필요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하고, 먹어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또 그 나라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고,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분이고,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그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빵으로' (또는, 밥으로) 내어주신 일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고, 그 일 자체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분께 우리 자신을 모두 내어드려야 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주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스의 성체성혈 대축일 강론

부활 3주간 금요일 (요한 6,52-59)

맛있는 음식  반영억라파엘신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회수를 늘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1월 25일 사도 성 바오로의 개종 축일/복자 하인리히 소이에(수소)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사도 9,13)

여러분 주위엔 좋은 사람만 있지는 않지요?
평판이 않좋은 사람, 나하고는 잘 맞지 않는 사람도 가끔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들이 때론 하느님께서 요긴히 쓰실 일꾼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 있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그 후자의 사람에게 잘 해 주라고 하실 때도 있지요.
오늘 하나니아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사울이라는 평판이 아주 못된 사람에게 가서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맘에 안내키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따로 쓰실 사람이라니 어쩝니까?
하나니아스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바오로라는 걸출한 복음의 사도를 잃을 뻔했습니다.

오늘 내 주위를 한번 돌아봅시다.
평판이 별로 좋지 않거나 내 맘에 썩 들지 않는 사람을 한번 바라봅시다.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의 손길을 한번 내밀어 보세요.

그가 회심하여
바오로 같은 하느님의 큰 일꾼이 될지 누가 압니까?

 [성경인물] 사도 바울 ② 회심한 바울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새터민, 탈북자라고 부릅니다. 최근까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내려온 사람은 30,000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그 이유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한이 북한 보다는 살기 좋을 거라는 기대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 , 직장, 배우자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한이 북한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예전처럼 많은 혜택을 주지는 않지만 지금도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향을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을 때입니다.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때입니다.

 

저도 생활하면서 핸드폰의 모델을 바꾼 적도 있습니다. 통신사를 바꾼 적도 있습니다. 노트북도 새로운 모델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는 것은 신선함도 있지만 익숙한 것을 떠나야 하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회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 스테파노가 죽는 것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동안 가졌던 신념과 신앙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생활이 힘들어서, 가난해서, 자유가 없어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사울은 이제 회심하여, 교회의 커다란 기둥이 됩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만드셨는지?’를 묻는 것은 지나친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그릇이 그릇을 만든 사람에게 나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묻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이 전 존재를 기꺼이 내어주시는 예수님께 왜 그렇게 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늘 사람들은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다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재능을 기꺼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시작이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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