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5-40)

2015. 4. 22. 오전 7: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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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5-40)

Rogier van der Weyden: Mary, Jesus, John the Evangelist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1,8)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로 내려간 것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교회가 밖으로 나가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8,1ㄴ-8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겨 주신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신다. ( (요한복음 6,35-40)     

 

시편 66(65),1-3ㄱㄴ.4-5.6-7ㄱ(◎ 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
○ 바다를 바꾸어 마른땅 만드시니, 사람들은 맨발로 건너갔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기뻐하네. 그분은 영원히 권능으로 다스리신다. ◎     

생명의 빵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복음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생명의 빵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 6,36)."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들이 안 믿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말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과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에 안 믿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안 믿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7-38)."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은 뽑으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나에게 오는 사람" 으로 해석됩니다.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라는 말은 "모두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게 된다."가 아니라, "모두 나에게 와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구세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구세주는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떠나지만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는 "내 뜻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잃지 않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배반자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바치신 기도에도 유다를 잃었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요한 17,12).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잃으신 것이 아니라 유다가 떠난 것입니다. 돌아올 기회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는 '잃은 양'이었지만, 그 자신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잃은 양'이 아니라 '목자를 떠난 양'이 되었고, 얻을 수도 있었던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내려주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가 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 세속적인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통해서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것인지...)

신앙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으로만 그치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지 않는다면 목적지를 잊어버린 나그네가 될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청하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면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영원히' 잘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내세,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바라지 않고, 또 공동체와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 자기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 바라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었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희망이 이기적인 것으로 바뀐다면 그 신앙이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바람'은, 그것이 간절한 것이라고 해도 거룩한 희망이 아니라 속된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는 기복신앙만 있는 종교를 사이비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해도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사이비 종교에 속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생명의 빵

<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한 6,35)

여러분은 빵을 좋아하세요?
요즘은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여하튼 빵이든 밥이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꼭 필요한 존재일까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여러분은 빵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쩔 수 없이
생명의 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처럼
빵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선한 빵
갓 구워낸 빵이 생명을 줍니다.
너무 오래 두어 유효기간이 지난 빵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오늘 신선한 빵이 되이주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즉시 내어주는 사람이 신선한 빵이겠지요.

맛있는 빵처럼
좋은 향기 풍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바오로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이것이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전망입니다.

이제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미약하나마 밖을 향한 선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신자들이 처음부터 선교를 목적으로 유다와 사마리아로 떠나간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나간 것입니다.

박해받는 교회가 그 박해를 피하여 흩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박해가 다른 곳에 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교회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테파노와 사울의 관계도 이와 유사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전하는 어제 독서의 마지막 구절은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사도 8,1)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스테파노가 죽은 다음 사울은 더욱 맹렬하게 교회를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굳이 스테파노의 순교 마지막에서 사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울의 회심이 스테파노의 순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곧,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그의 죽음으로 바오로 사도를 낳았던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테르툴리아누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은 가치관은 물론, 소신마저 헌신짝처럼 집어던지는 반면, 참혹하지만 장렬하게 목숨 바치는 순교자들의 피는 한 알의 씨앗처럼 수천수만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생명을 낳는 죽음,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계시를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가 부활하시어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신비로운 일치를 이루어 참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성립되는 새로운 관계란 아주 가깝고 친밀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 된다는 표현 이외에 더 적합한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 (8)

사도들은 박해를 받는 중에도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한국 천주교회도 그렇습니다. 박해가 심했을 때, 오히려 신앙은 더욱 뜨거웠고, 복음은 더 많은 곳으로 전해졌습니다.

교회의 재정도 여유가 있고, 새로운 성당도 많이 신축되었고, 사제의 숫자가 더 늘어나지만 요즘 교회는 예전처럼 뜨거운 활력이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분심과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세상의 일들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못나오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자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자주 기도드리면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영혼에 묻어 있는 허물들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여기고, 늘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성사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받아 모시는 것은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곧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시작하는 교육과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활기차게 할 수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교육과 피정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들은 교육과 피정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교육을 받고, 피정을 통해서 지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피정이 있어도 교육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병환자였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너무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하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강물에 몸을 담갔으며 나병은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세상의 것들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자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성사생활을 통해서 건강한 신앙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왔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나가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러나 아무나 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오늘이 중요하다     반영억라파엘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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