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금요일] 기쁨 (요한 16,20-23ㄱ)

2015. 5. 15. 오전 6:41:14

글자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기쁨 (요한 16,20-23ㄱ)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를 떠나 국제적으로 번화한 항구 도시 코린토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퀼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재판에 넘기지만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계속한다. (사도18,9-18)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에 제자들이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부활하신 뒤에 당신을 다시 뵙게 되면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16,20-23ㄱ)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 # 고린도 교회의 문제 ] 고린도의 시대적 배경과 고린도 교회의 문제

 인사 명령을 받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물기 힘든 곳,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머물렀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코린토는 그에게 별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던 곳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코린토는 복잡한 항구 도시인데다가 우상 숭배와 퇴폐풍조가 만연한 곳으로, 평판도 좋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지만 코린토 선교 활동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 갈리오 총독에게 넘겨주자, 총독은 바오로에게서 범법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손을 뗍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잘못도 없는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엉뚱하게 매질하여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매를 맞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했을까요? 그 뒤에도 코린토 사람들은 바오로를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난 다음, 내일 독서에 소개되는 아폴로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펴 나가자, 코린토 공동체는 바오로파, 아폴로파 등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교회 공동체를 세운 바오로의 권위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코린토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체험한 바오로의 복음 선포 기간 안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기간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직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코린토 사람들이 그를 크게 환영한 것도 아니고, 그가 꼭 필요하다고 붙잡고 매달린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 없어도 괜찮으니 이곳을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오로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그는 코린토에 머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또한 오늘 복음의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신뢰하면서 바오로는 좌절과 실패를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지나간 고통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아기를 낳은 엄마가 자기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과 감격으로 해산의 진통을 잊듯이,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어려움과 고통을 잊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 (고린도전서16장 5-12절)    고린도후서/교회의 혼란한 상황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여당, 야당, 정부는 분명 모두 국민을 위해서 대책을 마련하는데,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연금은 대상자가 일정부분 비용을 부담하고, 해당 기관에서 일부 지원을 해서 은퇴를 하면 매월, 혹은 일시불로 수령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은행이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고령화로 인해서 연금을 수령해야 할 대상자가 늘고 있으며, 출산율이 적어져서 연금을 부담할 사람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산출한 연금수령액으로 지불을 하면 연금은 줄어들고, 나중에는 연금을 내지만 수령액이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연금에 대한 운용을 투명하게 하고, 연금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을까요? 가끔은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은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신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리에 계시고,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야 하는 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 주셨고, 말씀으로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을 때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따랐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생각과 말은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없습니다.

 

뼛속까지 유대인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그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박해하였던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생각을 바꾸었고, 새롭게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큰 은총과 특전을 받은 신앙인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심으로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사목방침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입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새로운 복음화, 새로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사람이 되신 것은 겸손의 복음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신 것은 희생의 복음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드린 것은 봉사의 복음화입니다. 참된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더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봉사와 사랑을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펌-예수님과 어린이

<기쁨>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은 "너희는 나의 수난과 죽음을 보면서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는 "안 믿는 사람들은 나의 수난과 죽음을 보면서 좋아할 것이다."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참 기쁨'의 반대쪽에 있는 악마적인 즐거움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은 "나의 죽음 때문에 너희가 슬퍼하겠지만"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는 "부활한 나를 만나게 되면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좋아했던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희의 근심(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 다음에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신앙인들)만의 기쁨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세상'의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고, 악마적인 즐거움이 참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사탄은 자기의 패배를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지금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다가오고 있는 예수님의 수난을 예감하고 슬퍼하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제자들이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은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은 "그러나 내가 부활해서 너희를 다시 만나게 되면"입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는 "너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믿음과 기쁨과 용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는 "그 기쁨은 영원할 것이다."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직접 겪었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영원한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도들이 겪었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부활 신앙에서부터 시작된 생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고 그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슬픔과 두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슬퍼하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현실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스테파노 순교 뒤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사도 8,2)." 스테파노 자신은 성령이 충만한 모습으로(사도 7,55)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마도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장사 지낸 '독실한 신자들'은 그를 생각하면서 통곡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슬퍼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깊어도 박해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죽음은 무서운 일이고, 이별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고난과 슬픔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고난과 죽음과 이별은 잠깐이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쁨과 행복은 영원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죽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또 믿음이 있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 자체가(먹고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만큼이나 '희망'이 중요합니다. '희망'은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박해자들이, 또는 사탄이, 또는 먹고사는 현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덤벼들어서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하지만, 우리 스스로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믿음과 희망을 버린다면, 기쁨도 함께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을 빼앗기기도 전에 스스로 버리는 일입니다.

 

 

 

 기쁨의 원천   반영억라파엘 신부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새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또다시 참아 내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할 여자가 어여쁜 아기를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을 겪듯이 우리 또한 아픔의 시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한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 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고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아이들 예수님의 반칙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29-33)15.05.18조회 112[부활 제6주간 토요일]청하여라 (요한 16,23ㄴ-28)15.05.16조회 90[부활 제6주간 금요일] 기쁨 (요한 16,20-23ㄱ)15.05.15조회 47<성 마티아 사도 축일>(2015. 5. 14. 목)(요한 15,9-17)15.05.14조회 45진리의 영 (요한16,12-15)15.05.13조회 64[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요한 16,5-11)15.05.12조회 76[부활 제6주간 월요일]진리의 영 (요한복음15,26─16,4ㄱ)15.05.10조회 84<부활 제5주간 토요일> 내 이름 때문에 (요한 15,18-21)15.05.09조회 87<부활 제5주간 금요일>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17)15.05.08조회 141[부활 제5주간 목요일]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15.05.07조회 121<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나는 참포도나무요 (요한 15,1-8)15.05.06조회 45[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준다 (요한 14,27-31ㄱ)15.05.05조회 452015. 5. 4. 월<부활 제5주간 월요일>사랑 (요한 14,21-26)15.05.04조회 45<부활 제4주간 토요일>성 아타나시오 축일 (요한 14,7-14)15.05.02조회 452015년 5월 1일 노동자의 주보 성 요셉 축일 (마태오 13,54-58)15.05.01조회 44[부활 제4주간 목요일] 나를 보내신 분 (요한 13,16-20)15.04.30조회 45[부활 제4주간 수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요한 12,44-50)15.04.29조회 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