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월요일]진리의 영 (요한복음15,26─16,4ㄱ)
바오로 사도 일행은 마케도니아로 와 달라는 환시를 보고 길을 떠나 필리피에 도착한다. 바오로 사도가 지금까지 선교한 곳은 모두 아시아 지역이었는데, 이제 처음으로 유럽을 향해 가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은 리디아는 바오로를 자기 집에 맞이한다. (사도행전 16,11-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진리의 영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성령께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시고, 그 성령에 힘입어 제자들도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박해도 받게 될 것임을 미리 알려 주신다. (요한 15,26─16,4ㄱ)
시편 149,1ㄴㄷ-2.3-4.5-6ㄱ과 9ㄴ(◎ 4ㄱ)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
○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
○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한복음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을 찾아가서 선교하고, 노동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며, 그 지역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를 위하여 늘 염려하면서 서간을 통하여 가르치면서 돌보는 선교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필리피를 찾아가 그곳에 공동체를 세웠을 뿐 아니라 유럽에 복음을 전하려고 필리피를 근거지로 삼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증인이 되면 박해가 따르게 될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내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요한 복음이 저술될 당시에 교회가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귀담아듣고 특별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박해가 사라지고 순교의 기회가 없어지자, 교회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 격랑에 휘말리면서 온갖 위험과 위협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유혹과 위험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인 동시에 십자가입니다. 그 당시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받게 될 십자가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회당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인 회당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연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분명 고립되고 추방되고 모든 문으로부터 폐쇄당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독하다는 것은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요구 조건일 수 있기에 고독과 고립은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념>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5,2)."
이 말씀은 제자들이 겪게 될 '유대교의 박해'를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파문하고 회당에서 추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붙잡아서 고문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들과 신자들은 그렇게 박해를 받았고, 죽었습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즉 하느님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말씀은 박해의 잔인함과 끔찍함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싫어서, 또는 미워서 박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에 의해서 박해를 한다면, 그만큼 더욱 잔인해지고 가혹해지게 됩니다.
바오로가 사도가 되기 전에 스테파노를 박해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사도 26,9-11; 갈라 1,13-14). 사도행전과 서간문 등에 있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증언을 보면,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 일은 옳은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적극적으로 박해를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박해를 보면, 박해자들은 천주교를 아주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고, 또 천주교 신자들을 사이비 종교에 물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해자들이 늘 악한 마음으로 천주교를 박해한 것은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위험한 암세포 같은 사이비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신념으로 천주교를 박해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을 항상 증오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타이르고 달래고 설득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리적인 박해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지만, "너희는 이단이다. 사이비다. 너희는 지금 속고 있다." 라는 설득과 회유 자체도 참기 힘든 박해가 됩니다. 그런 설득은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유혹으로 작용합니다. 마음속에 "혹시 저 말이 맞는 것은 아닐까?" 라는 작은 의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게 점점 자라서 결국 믿음을 잃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옛날과 같은 박해는 별로 없지만, "이단이다. 사이비다." 라고 공격하는 자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또 신앙생활은 어리석은 짓이고,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유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공격과 유혹을 극복하려면, 믿음 이상의 강한 신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신앙과 종교에 대한 신념, 그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박해를 할 때, 그래서 그들의 신념과 나의 신념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이 정말로 옳은 신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 번째 판단 기준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위해서' 라고 주장해도, 그 일을 증오심으로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1요한 4,8) 하느님의 일은 사랑으로만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자기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 증오심은, 그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오직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상숭배나 미신과 맞서 싸울 때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중세기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역사를 보면,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교회의 모습에 사랑은 없었고 증오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자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박해 가운데에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오는 박해도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은데도, 신앙생활의 방식에 대한 의견이 다르고, 성경 해석이 다르고, 교리 적용이 달라서 충돌할 때, 그럴 때에도 역시 첫 번째 판단 기준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미움만으로 실천하려는 신념은 잘못된 신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나 신념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경우에도 의견이 서로 달라서 갈등을 겪는 일이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사랑'이 대원칙입니다. 만일에 갈등을 미움과 증오심과 억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식량 배급 문제로 갈등이 생기고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의 권위와 권한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불평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일곱 봉사자를 뽑은 일이 그것입니다(사도 6,1-6). 그 일에서 갈등을 '사랑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일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제도와 직책을 만드는 일이고, 또 사람들을 새로 뽑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사도들은 함께 모여서 많이 기도하고 묵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마태 18,20), 그 약속대로 사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지혜와 사랑을 주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때 사도들이 화를 내고, 신자들을 혼내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하고... 그랬더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리디아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도 잘 모르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정치판을 봐도 그렇고
SNS 상에서도 서로를 죽이려고 하며
자신이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시겠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은 생명을 존중합니다.
누구를 파멸시키려고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살릴까를 고민합니다.
어떤 죄인도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죽이는 일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오상선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