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토요일]참된 증언 (요한 21,20-25)
아그리파 왕
앞에 선 바오로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은 바오로 사도가 황제의 판결을 받으러 로마에 도착했음을 전해 준다. 카이사리아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오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 천사가 바오로에게 나타나 그가 황제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바오로도 로마에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야 복음이 “땅끝까지”(사도 1,8)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사도28,16-20.30-31)
한편 요한 복음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른 제자에 대해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너는 나를 따라라.” 그저 그뿐이다.(요한 21,20-25)
시편 11(10),4.5와 7(◎ 7ㄴ 참조)
◎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옥좌에서,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
○ 주님은 의인도 악인도 가려내시고,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라. ◎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아닌 다른 제자를 특별히 총애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는 이미 죽고 다른 제자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에 결코 장애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황제의 판결을 받으러 로마에 도착하여 집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게 반대를 받는다 해도, 또 총독이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자기가 계속 죄인 취급을 받는다 해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후대의 선교사들이 하듯이 그렇게 선교사 파견 예식을 하고 축복을 받으면서 떠났든, 죄인으로 호송되었든 그것은 그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방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그의 앞날은 불확실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그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중심인 로마까지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서 멈추고 그다음에 전개되는 상황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많은 일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 ‘방해’ 사유가 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심 없이 사도들과 같은 담대함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청해 봅니다.
각 개인에게는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소명이 있습니다. 바오로에게는 그리스도교의 개척자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의 양 떼인 하느님의 백성을 부양하고 다스리는 목자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요한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양 떼를 양육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다면, 요한 사도는 장수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하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과 능력은 서로 다릅니다. 또한 각 개인에게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고유한 길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을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참된 증언> 송영진 모세 신부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21,24)."
'이 제자'는 사도 요한이고, '이 일들'과 '증언'과 '기록'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서의 내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말은, "나의 증언은 참되다." 라는 선언인데, '참된 증언'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서의 내용에 거짓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요한복음서의 내용은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도들이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게 되고, 또 사도들의 증언이 '참된 증언'이라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하게 됩니다. 만일에 사도들을 믿을 수 없고,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복음서 저자들로 좁혀서 생각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고, 복음서에는 거짓 증언이 하나도 없고, 오직 '참된 증언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만일에 복음서에 아주 작은 거짓말이라도 들어 있다면, 그 거짓말 하나 때문에 복음서 전체를 믿을 수 없고, 그러면 예수님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을 증언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인데, 말과 행동에(삶에) 거짓이 있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신앙인의 말과 행동에(삶에) 거짓이 있다면, 선포와 증언과 고백 자체가 거짓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거짓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증언을 듣기 전에, 또는 들었더라도 그 증언을 믿기 전에 어떤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스테파노의 설교와 증언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오로 사도처럼 성경을 읽기 전에, 또는 교리를 배우기 전에 체험을 먼저 하고, 그 체험 덕분에 신앙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고 해도 성경은 읽어야 하고('말씀'은 들어야 하고),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직접 보았고, 믿고 있고,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나라까지 가는 길을 알아야 하고, 그 길을 걸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을 만난 뒤에 다른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아주 많이 공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영적 체험을 하거나, 또는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체험하는 경우에, 그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분열시키는 일도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 중에 또는 환시 중에 누군가를 직접 만나서 어떤 가르침을 들은 일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자신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들은 가르침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르침과 다르다면, 또 그 만남의 결과가 교회의 혼란과 분열이라면, 그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을 어떤 사람에게 주신다면, 즉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다른 가르침을 주신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둘 다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들이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이 말은,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관점을 달리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들이, 즉 예수님의 사랑이 복음서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풀밭 위의 비처럼, 땅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게 하소서.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시편 72,6-8)." 이 구절은, 메시아의 정의와 평화가, 또는 정의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메시아의 사랑이 온 땅과 온 바다를 영원히 적시기를 바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그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믿음을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 올 겁니다.
누가 어떻다 하더라 그게 사실일까?
설마 그럴려고...
나에 관한 일이 아니기에 정확한 팩트가 무언지 알 수가 없기에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점점 확대재생산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구경꾼도 되었다가
중개자도 되었다가 재판관이 되기도 하지요.
저는 SNS가 점점 소통이 어려운 이 시대를 위한 최고의 소통도구라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확대시키고 날라 사람을 무참히 매장시킬 수도 있는
무섭고 흉칙한 살인도구가 될 위험성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일에 너무 개입하지 맙시다.
남의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맙시다.
그게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저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르면 될 뿐입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일이고
우리의 구원과 연관된 일이 아닐른지요?
[출처] 2015.05.23.|작성자 알타반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