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화요일]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기념일 (마르코 10,28-31)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도 가졌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필립보 네리는 특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형제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1595년 선종하였고, 1622년 시성되었다.
기원전 2세기의 율법 학자였던 벤 시라는 율법을 지키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제대로 제사를 바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올바른 삶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제물은 의미가 없다. 올바로 살지 않으면서 제물을 바쳐 심판을 피하려 하는 것은 뇌물을 바치는 것과 같으며, 그런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신다.(집회서35,1-15)
베드로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부자 청년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씀드린다. 그들에게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큰 갚음이 있을 것이다.(마르코 10,28-31)
시편 50(49),5-6.7-8.14와 23(◎ 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내 앞에 모여라, 나에게 충실한 자들아,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네. 하느님, 그분이 심판자이시네. ◎
○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아, 나 너를 고발하노라. 나는 하느님, 너의 하느님이다.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
○ 하느님에게 찬양 제물을 바치고, 지극히 높은 분에게 너의 서원을 채워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현세, 내세> 송영진 모세 신부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마르 10,25)을 들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라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이 말 뒤에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태 19,27).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은 예수님께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 말도 아니고,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색내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9-31)."
이 말씀은, "너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린 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린 '이유'와 '목적'입니다. 버린다고 다 가치가 있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려야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무소유와 청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무소유와 청빈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버린다는 말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과 복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희망하면서, 다른 것들은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얻는 일에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무조건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은 신앙생활의 '영적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족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가족이 신앙생활을 막는 박해자라면, 또는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 간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가족이 지옥을 향해서 갈 때,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함께 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과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은 바로 붙여서 읽는 것이 옳습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고, 모든 것을 백 배나 받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백 배나 받는 일은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백 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보상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표현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생명, 평화, 행복은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인데, 그것을 '백 배' 라는 말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30)." 이 말씀도 현세에서 물질적인 보상과 대가를 받게 된다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평화를 현세에서도 미리 얻어서 누릴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죽도록 고생만 하고, 죽어서야 행복하게 되는 그런 생활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느님 나라의 삶'을 미리 살면서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의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세속 생활의 고난'이 공존하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기쁨과 참 평화와 참 행복을 얻는다고 해도, 그래도 여전히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을 겪고, 세속에서의 생활이 많이 힘들어도,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과 참 평화와 참 행복을 미리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루카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처럼 현세와 내세의 처지가 정반대로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부유함과 권력과 명예 등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경고'의 말씀이 되고, 반대로 지금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마지막에 행복하게 되는 사람이 진짜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에서 "많을 것이다." 라는 표현은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들에 대해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해도, 또는 지금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끝까지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처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었지만, 중간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갔습니다.
신학교에서 ‘성적평가’에 대한 기준을 전해 왔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대학원생들은 기준이 완화되어서 상위 점수를 조금 더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만, 평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을 모두 읽어보고, 점수를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선거’라는 과정을 거쳐서 평가를 받습니다. 기업가들은 영업이익에 따라서 평가를 받습니다. 평가의 결과는 냉정합니다. 선거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의 험난한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평가를 하고, 평가를 받는 것이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은 개선하고, 장점과 강점은 더욱 키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24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거나, 구체적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강점을 개발하고, 좋은 습관을 유지하고, 독서를 하고, 이상을 현실화 시키는 측면에서 많이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사제생활이 주어진 업무를 정해진 기간에 마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과가 적다고 큰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부족해도 신자들은 사제라는 직무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눈에 보이는 박해는 없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질, 자본, 재물’은 우리의 영혼에 이미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는 하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서로 포용하고, 융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전해지는 정보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가야할 길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수도자들이 착복식, 허원식을 할 때 당부하는 글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영적으로 새로이 태어났기에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것, 수도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신분상승의 표시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세상의 옷을 벗고 수도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세상을 벗고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뭔가 획득하겠다는, 뭔가 상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기꺼이 이 세상에서 손해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착복하겠다는 것은 가장 아랫자리로 내려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서원하겠다는 것은 내 의지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께 묶어두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도자들이 물 좋은 자리 찾기 시작하면 그 수도생활은 이미 볼 장 다 본 생활입니다. 수도자가 떠나라는데도 안 떠나고 버티기 작전으로 나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수도자가 고상하게 꾸며진 넓은 사무실에 애착을 느끼고, 안온한 독방에 갇히기 시작하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주님의 옷으로 갈아입은 여러분! 늘 버리십시오. 용기를 내고 떠나십시오. 고상한 곳, 살 맛 나는 곳, 때깔 나는 곳이 아닌 저 시끄럽고 악취가 풍기는 세상의 한가운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거기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때로 시련과 좌절,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선을 베풀라고 이야기 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맞서 싸우라고 이야기 합니다. 한 알의 밀알로 남지 말고, 죽더라도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을지라도 굳세게 이겨내라고 이야기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불의를 멀리하고 속죄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집회 35,3-4)
부처님 오신 날을
실상사에서 함께 보냈습니다.
"선업", 즉 선을 쌓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옛적에 걸인들이 동냥을 청하면서
"한푼 적선하십쇼" 하곤 했지요.
"적선"(積善)이 곧 선을 쌓는 행위지요.
남에게 은혜를 갚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하늘에 선을 쌓는 일이랍니다.
우리 수도회도
탁발수도회입니다.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은 늘 동냥을 청해 왔지요.
프란치스코는 동냥 청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이것이야말로
청하는 사람도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고
희사하는 사람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덕행이기 때문이라네요.
그렇습니다.
오늘은 적선합시다.
선을 쌓읍시다.
하늘에 쌓읍시다.
은혜를 갚고 자선을 베풉시다.
그것이 그 어떤 기도예물보다
더 훌륭한 찬미의 제사가 되니까요.
[출처] 2015.05.26.|작성자 알타반
<오늘의 묵상>
벤 시라는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일곱 배로 갚아 주시리라고 가르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무엇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투자 수익률 일곱 배, 또는 백 배일까요?’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 이렇게 수익률이 높고 보장된다면 해 볼 만한 거래임에 틀림이 없겠지요. 더욱이 주님께 예물을 열심히 바치면 축복을 많이 받을 거라고 자신 있게 강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셈법으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께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어떤 이득을 얻어 내려고 건네는 것이 뇌물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공정하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당신께 무엇을 드린 사람이라고 무조건 잘 보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화답송 시편에서 노래하였듯이, 우리의 번제가 늘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의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가족과 재산을 버리는 것은 백 배로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에서도, 각자가 받을 보상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일깨우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보상은 이 세상을 초월한다는 것, 곧 현세의 보상보다는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는 데 무게의 중심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말씀대로 종말이 되면 현재의 서열이 뒤바뀌어 첫째가 꼴찌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첫째와 꼴찌의 기준은 하느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기마저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 관계에서도 흔히 경험합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돌아오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돌려받으려고 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이기 때문에, 이미 순수성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예물이, 아무런 계산이 없는 깨끗한 제물이었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복음 환호송).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출세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