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금요일>(2015. 5. 22. 금)(요한 21,15-19)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펠릭스 총독에게 보냈는데, 펠릭스는 판결을 내리지 않고 바오로를 그대로 둔다. 그의 후임인 페스투스 총독 때에 바오로는 황제에게 상소한다. 총독은 먼저 아그리파스 2세와 그의 누이동생 베르니케 앞에서 바오로를 신문한다. 그들은 모두 바오로가 투옥이나 사형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황제에게 보낸다.(사도25,13ㄴ-21)
요한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주신 다음 그가 겪게 될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요한21,15-19)
시편 103(102),1-2.11-12.19와 20ㄱㄴㄹ(◎ 19ㄱ)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당신 왕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그분 말씀을 따르는 힘센 용사들아. ◎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부활 시기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부활 시기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처음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전례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독서를 통하여 부활, 기쁨, 생명, 평화를 힘차게 선포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도행전과 요한 복음에서는 오히려 증언, 박해, 순교를 되풀이하여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역시 바오로 사도가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페스투스 총독의 입으로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바오로의 죽음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페스투스의 처신과 행동은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던지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 하더라도 자기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사랑하겠다고 장담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그가 부끄러운 과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끄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백에 따른 사명은 그에게 십자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고 커다란 희생을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 죽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신 말씀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였을까요? 베드로가 순교하게 되는 시점에서 오늘 복음의 장면을 회상해 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교회를 헌신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은 순교였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 것이, 그분 양 떼를 열심히 돌본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바오로도 그 길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을 거쳐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압니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오묘한 진리를 …… !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세 번 대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세 번 당부하십니다(요한 21,15-17).
같은 말이 세 번씩 반복된 것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잘못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일을 꾸짖으시는 것은 아니고, '보속'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당신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서 그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고, 그를 교회의 지도자로 더욱 확고하게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예수님께도 상처를 드린 일이었고, 그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남긴 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행동을 하고 나서 곧바로 회개했지만, 회개한 뒤에도 예수님께 죄송스러운 마음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 등 때문에 오랫동안 몹시 괴로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전체 교회를 맡기려면 그 상처부터 치유해서 다시 강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자주 흔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너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 라는 뜻으로도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단순하게 대답하지 않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물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합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잘 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믿음을 잃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겁에 질려서 그랬던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베드로를 비난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비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닥쳐도 나는 절대로 안 그럴 것이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장담했었습니다(루카 22,33). 우리는 위대한 사도도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고, 자기는 안 그럴 것이라는 자만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당부하신 것은 '양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석되고, 또 베드로를 믿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양들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제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으실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를 믿으실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쪽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께 우리를 믿으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 양들'이라고 표현하셨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돌보아야 하는 양들은 베드로의 양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목자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오직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 쪽에서 생각하면, 교회의 사목자는 예수님을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님의 양들이기 때문에 양들을 베드로에게 맡기셨다고 해도 예수님도 함께 양들을 돌보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약속이 아니라, 모든 양들에게도 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내 양들'이라고 부르시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니 우리 쪽에서도 '우리 목자,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입으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착한 목자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목자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4-5)." 이 말씀은, "양들은 목자의 말만 들어야 하고, 목자만 따라가야 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고,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낯선'이라는 말을 '새롭고 신기한'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풍조가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방해하는 유혹으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새롭고 신선하고 신기한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면, 그런 것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물론 사랑하시겠지요?
그런데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늠하긴 어렵겠죠.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면 좀 감이 잡힐 겁니다.
오늘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저사람은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나는 저사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교회 제단체의 봉사자는 능력이나 친화력이 자격요건은 아닙니다.
진정 교회의 봉사자가 되려면
다른 교우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들이 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에 따라
그 교회는 참으로 주님의 정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봉사자는
과연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인지,
나는 과연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가 될만큼
주님 사랑에 자신이 있나 한번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출처] 2015.05.22.|작성자 알타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반영억신부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 번의 사랑고백이 우리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 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극중에서 오 말수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부잣집에 도우미로 들어갔습니다. 드라마가 그렇듯이 주인집 아들이 가난한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의 결과 둘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집에서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이 엄마에게는 병이 든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부잣집에서는 수술비를 주면서 아이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남편에게는 아이 엄마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엄마의 장례를 치루고 찾아온 아이 엄마에게는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바람난 여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이를 먼저 보낸 슬픔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1991년에 있었던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입니다. 사람의 필체는 사람의 지문처럼 각기 다르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강기훈 씨는 유서를 대필했다는 누명을 쓰고 3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유서의 필적을 감정한 기관은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였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처럼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의 거짓 판정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강기훈 씨는 재심청구를 하였고, 24년이 지난 2015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욕심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짓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힘과 권력을 이용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진실은 드러난 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알고 계시고, 거짓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이 알고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와 현실에서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잘못한 사람이 결국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도 지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모두에게 화해와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결말이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해자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감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일삼기 마련입니다.
왜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은 일들이 계속될까요?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나치에 협력한 이들을 심판했습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나라는 드라마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질문하십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주변의 억울한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병든 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된 모든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