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목요일>(2015. 5. 28. 목)(마르 10,46ㄴ-52)
집회서의 마지막 부분인 42―50장에서는 자연과 역사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한다. 오늘 독서는 그 첫 부분으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주 만물을 바라보며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 있게 정하신 주님”을 기린다.(집회서 42,15-25)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시력을 되찾게 해 주시리라고 믿기에, 다른 사람들이 꾸짖어도 계속 부르짖는다. 바르티매오는 그 믿음으로 구원되어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마르코 10,46ㄴ-52)
시편 33(32),2-3.4-5.6-7.8-9(◎ 6ㄱ)
◎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시고, 당신 입김으로 천상 만군 만드셨네. 그분은 둑을 쌓아 바닷물을 모으시고, 깊은 물을 곳간에다 넣으신다. ◎
○ 온 땅이 주님을 경외하고, 온 세상 사람이 그분을 두려워하리라. 그분이 말씀하시자 이루어지고, 그분이 명령하시자 생겨났네. ◎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코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남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데도 바르티매오는 왜 소리를 질렀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떠나실 때 제자들과 많은 군중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은 이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메시아시라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바르티매오를 꾸짖고, 바르티매오는 저지를 당하면서도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다른 이들은 앞을 볼 수 있었는데 바르티매오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것을 보면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라 지니고 있던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지극히 중요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이들도 서로 다른 동기로 그분을 열심히 추종하였겠지만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결정적인 장애와 간절한 열망을 반드시 채워 주실 분이시라고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에게는 이렇게 예수님의 도움이 아주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리코를 떠나가시는 예수님을 결코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그가 예수님을 찾아가기도 힘들었을 텐데, 마침 자기 앞을 지나가신다니 당장 그분을 꼭 붙잡아야 했을 것입니다.
“(너는 네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17). 요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가난하고 눈멀었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바르티매오처럼 주님을 믿고 구원을 체험하고 그분을 따라 나서게 될 것입니다. 바르티매오는 길가에서 구걸하던 걸인이었지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간청하여 자기 소원을 이루자 그는 곧바로 감사드리면서 그분께 충성하였습니다.
감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감사는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해 줍니다. 감사드리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도 미덕이라면 하느님께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리던 사람들은 이른바 볼 수 있다고 자부하던 예수님의 측근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혹시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외칩니다(마르 10,47).
'길가에 앉아 있다가' 라는 말은 '구걸을 하고 있다가' 라는 뜻입니다. 거지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말은 몇 푼의 돈을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바르티매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은 것도(마르 10,48) 돈을 달라는 말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청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청한 것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마르 10,51),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은 나에게 새 인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것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십니다. "가거라." 라는 말씀은 "네가 희망한 대로 이제부터 새 인생을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네가 믿고 청하니 너의 청을 들어주겠다." 라는 뜻이지만, 지금 이 내용에서는 바르티매오의 새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암시하시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새 인생은 '믿음의 길', 또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마르 10,52). 이 말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신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중이고, 예루살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수난과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된 바르티매오는 새 직업을 구해서 새롭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새 직업을 찾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에게서 새 인생을 찾았다고 확신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새 인생을 찾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우리 입장에서도 바르티매오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보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그가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고, 그냥 바로 예수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청했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셨을까? 앞을 보지 못하거나 말을 듣지 못하거나 다른 어떤 신체장애가 있다고 해서, 또는 어떤 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신자)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건강한 사람들만 제자로 받아들이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의 건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평생 어떤 병을 앓았습니다(2코린 12,7-8). 예수님께서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하신 것은 그의 건강이 아니라 영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바르티매오가 다시 볼 수 있게 된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을 떠나버렸다면? 그런 다음에 새 직업을 얻어서 새 인생을 살면서 구원과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살게 되었다면? 거지로서 구걸하면서 살던 때와 비교하면 그것도 새 인생으로 보이긴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지도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그대로 끝나버렸다면, 그것을 '새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 덕분에 건강해졌지만, 그의 인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 가운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고, 다른 아홉 명은 그냥 가버렸는데, 그들도 몸만 건강해지고 인생은 바뀌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종합하면,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참한 인생을 살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고(마르 10,49), 그는 응답했습니다(마르 10,50). 거꾸로 말하면, 그는 먹고사는 것만으로 그치는 인생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고(요한 4,18),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요한 4,15). 겉모습은 다르지만, 바르티매오의 인생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여자와 비슷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는 인생인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51)
이 아름다운 계절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런데 만약 사고나 다른 이유로
실명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실명한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건 당연히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여기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잘 볼 수 있는 눈이 있지요?
잘 들을 수 있는 귀도 있고 말할 수 있는 입도 있지요?
일할 수 있는 손도 있고 걸을 수 있는 발도 있나요?
그중 한가지라도 없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그러니 정말 감사하며 살아야하지 않겠어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선물을 거저 받고 있는데
무엇이 부러울까요.
오늘 내가 볼 수 있음에 감사드립시다.
혹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었는데 지금은 연옥과 지옥만 보인다면
다시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도록 청해 봅시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으셨네요.
[출처] 2015.05.28.|작성자 알타반
한 달에 한 번씩 동창회를 합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는 성당이나, 숙소에서 동창회를 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즐거운 시간이고, 모처럼 편안하게 지내는 시간입니다. 친구들을 만날 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 그리고 다른 이들을 험담하는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를 만나면 부담이 됩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가랑비에도 옷이 젖는다고 나 역시도 불평과 불만에 젖어들고 누군가를 평가하고 비난하는 말에 동조하곤 합니다. 다른 부류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 친구와 함께하면 나도 희망의 기운이 생기고,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고 용기를 내게 됩니다.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질문해 봅니다. 어제 만난 이웃과 나는 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제 만난 이웃들과 무슨 대화를 주로 하셨는지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물리적으로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역사를 바꾸기도 하고, 큰 아픔을 주기고 하고,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너는 도대체 왜 그 모양이냐!’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은 실패한 인생을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말씀, 힘을 주는 말씀, 위로를 주는 말씀, 겸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돈, 제도, 군사,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 시키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녔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씀은 지난날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시오, 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이 말씀은 메마른 사막을 지나는 우리의 인생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왔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이 가야할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요즘 제 1독서는 집회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분께서는 깊은 바다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그 술책을 꿰뚫어 보신다.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알려 주시고, 숨겨진 일들의 자취를 드러내 보이신다.’
오늘 바르티메오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능력과 준비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만이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면 그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눈앞에 주어진 일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저는 눈을 뜨고 있지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