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토요일]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
쿠에틴 마사이스, [아버지를 치료하는 토비아],1550년 경샤르트뢰즈 박물관, 두에
라파엘은 토빗과 토비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토빗은 그가 아자르야라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토비야와 사라의 기도를 하느님 앞으로 가져간 천사였다.(토빗12,1.5-15.20)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율법 학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다르다. 가난한 과부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적은 돈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가진 것을 모두 바쳤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예물을 바친 것이다(복음).
토빗 13,2.6ㅁㅂㅅㅇ.6ㅈㅊ.6ㅋㅌㅍ(◎ 1ㄴ)
◎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그분은 벌을 내리시지만, 자비를 베푸시고, 깊은 저승으로 내리기도 하시지만, 무서운 파멸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그분 손에서 벗어날 자 아무도 없으리라. ◎
○ 이제 너희에게 베푸신 것을 보고, 소리 높여 그분을 찬양하여라. 의로우신 주님을 찬미하고, 영원하신 임금님을 높이 받들어라. ◎
○ 나는 이 유배의 땅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죄 많은 민족에게 그분의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리라. ◎
○ 죄인들아, 돌아와 그분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여라. 그분이 너희를 받아들이시어 자비를 베푸시지 않겠느냐? ◎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사람 같은 천사와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토빗기에서 라파엘을 만나는 이들은 그가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토빗이 아들 토비야에게 유언을 하고 자신이 맡겨 둔 돈을 찾아오라고 아들에게 심부름을 보내면서 그와 동행할 사람을 찾고 있을 때 라파엘 천사가 나타나 길잡이를 하겠다고 자청합니다. 이때 토빗과 토비야는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라파엘 자신도 그가 누구인지 묻는 토빗에게 “저는 어르신의 동포로서 대하난야의 아들 아자르야입니다.”(5,13)라고 대답합니다. 아자르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뜻합니다. 과연 그는 천사였을까요, 사람이었을까요?
토빗도 길을 떠나는 아들 토비야에게 “너의 동포인 이 사람과 함께 가거라. …… 그분의 천사께서 너희가 안전하도록 동행해 주시기를 빈다.”(5,17)고 말합니다. 라파엘은 사람이었을까요, 천사였을까요? 토빗기에는 눈길을 끌 만한 커다란 기적과 같은 내용은 거의 소개되지 않습니다. 여행 도중에 라파엘 천사는 토빗의 시력을 되찾아 주려고 사용하게 될 물고기의 쓸개와 염통과 간으로 약을 마련하였는데 그의 모습은 그저 한 사람의 약사처럼 보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실을 “동포” 가운데 한 사람이 낯선 길을 떠나는 토비야에게 천사가 되어 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말로 라파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치유”를 뜻합니다. 토비야가 사라의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그 여자에게서 악귀를 쫓아내고 치유의 기쁨을 주었듯이, 우리도 살아가면서 고마운 분들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데, 이분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천사가 아닐까요? 그 천사들 덕분에 우리는 낯선 이 세상의 길을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나도 다른 사람의 작은 천사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봉사보다는 가장 높은 자리를 탐하면서 명예와 명성을 얻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율법 학자와,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신뢰로 생활비 모두를 헌금한 과부의 모습이 비교됩니다.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남겨 두지 않고 어리석고 무모할 정도로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의 정성과 믿음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아울러 율법 학자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명예나 존경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송영진 모세 신부
6월 6일의 복음 말씀은,마르코복음 12장 38절-40절,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41절-44절,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우선 먼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라는 예수님 말씀은, "헌금의 액수보다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하다."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또 '가진 것을 모두 다' 봉헌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어떤 마음으로 봉헌했는가? 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과부가 어떤 이유로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된다면, 그러면 그 과부는 그때에도 전 재산을 봉헌하게 될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의 마음을 칭찬하셨기 때문에 그 과부는 부자가 된다고 해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고, 전 재산을 봉헌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가난하던 때에는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던 사람이 부자가 된 다음에는 다른 부자들처럼 '풍족한 데에서 얼마만' 봉헌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를 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던 때에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한 일은 '위선'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원래는 위선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재산 때문에 위선자로 변하는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반대로 '풍족한 데에서 조금' 봉헌했던 부자들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가난해진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회개하고 '가난한 과부'와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욱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부자였다가 가난해질 수도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인데, 많은 부자들이 자기들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고, 혹시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타격을 안 받으려고 이기적으로 재물을 움켜쥔 채로 살고 있습니다.
이 내용 앞에 있는 율법 학자들에 관한 말씀에 나오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 학자들'을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들'과 동일 인물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대부분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었고(마태 23,25), 겉으로는 의인으로 보였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마태 23,27-28). 율법 학자들이 탐욕, 방종, 위선, 불법으로 가득했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서 재산을 모으는 자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은 남의 돈을 자기 돈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고, 헌금함에 자기 돈은 넣지 않고 남의 돈을 넣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리 '큰돈'을 봉헌한다고 해도 그것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풍족한 데에서 약간의 돈을' 봉헌하면서 생색내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돈을 어떻게 얻었고 모았는가? 가 진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재산을 모으고,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내놓으면서 '큰돈'을 내놓는다고 생색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든지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든지 간에...)
착취는 도둑질이고, 생색내는 것은 위선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서 모은 것이라면, 그 돈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런 재산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서 회개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또 그런 재산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받아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말로 회개한다면, 재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들을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에 되돌려 놓는 일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봉헌'이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일입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도 '나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것'을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성실하게 노동을 하고, 정당하게 벌어서 먹고살면서 성의껏 하느님께 헌금을 바치는 착한 사람들의 봉헌을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묵묵히 일해서 자기 양식을 벌어먹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2테살 3,12). '형편이 닿는 대로(1코린 16,2)' 봉헌하거나 성금을 내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1코린 8,12)."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은 모든 신앙인이 지금 당장 그렇게 자기의 '전 재산'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명령은 아니고, 그 과부의 마음과 정성을 본받으라는 '권고'입니다.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악착같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당연히 악한 일이고,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악한 일입니다.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아까워하게 되고, 봉헌하면서 생색내게 되고, 칭찬을 받으려고 스스로 나팔을 불게 됩니다(마태 6,2).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을 상'이 없다는 말씀은, '받을 벌'만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마르 12,41-42)
여러분은 부자입니까?
주일헌금은 보통 얼마나 하시나요?
교무금은 얼마를 내셔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후원금은 또 얼마나 내시나요?
여러분은 가난하시죠?
그래도 주일헌금은 많은 액수는 아니어도 조금은 하시죠?
교무금도 많이는 못해도 하실거구요.
어려운 살림이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래도 맘이 동해 조금이라도 후원하고 싶어하시죠?
오늘 내가
주일헌금을 5만원 하였다고 우쭐하십니까?
돈이 없어 천원밖에 못 넣었다고 죄스러워 하시나요?
봉헌을 많이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많은 재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분께 받은 것을 돌려드리니 당연히 할 바를 했을 뿐이니
결코 자랑하거나 우쭐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자식 학원보낼 돈도 없으면서
남들이 뭐랄까봐
체면 때문에 교회와 사찰에
돈을 갖다 바치며 복을 비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도 말아야겠지요.
거저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액수에 상관없이 그 주인이신 분께 작은 정성을 바치면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많이 가졌다고 흥청망청 말고
적게 받았다고투덜대지 말며
받은 것에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작은 정성으로 봉헌하는 멋진 날 꾸미소서.
[출처] 2015.06.06.|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