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수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마르 12,18-27)

2015. 6. 3. 오전 7:00:18

글자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15. 6. 3. 수)(마르 12,18-27)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6월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시성하였다.     

기꺼이 자선을 베풀었지만 늘 불행만을 만나게 되자 토빗은 괴로워하며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는 조상들과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서 고백하면서, 곤궁과 모욕을 당하게 되기보다는 죽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한다. 한편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첫날밤을 넘기지도 못하고 매번 신랑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사라도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다다랐다. (토빗3,1-11ㄱ.16-17ㄱ)

예수님께서는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인이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부활한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대답하신다.((마르12,18-27) )

 

 시편 25(24),2-3.4-5ㄱㄴ.6과 7ㄴㄷ.8-9(◎ 1)
 ◎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저를 맡기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원수들이 저를 보고 좋아라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이는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나, 터무니없이 배신하는 자들은 망신을 당하리이다. ◎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2014년 6월 3일 화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무일도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토빗의기도
[오늘의 묵상]

토빗은 너무나 황당하게 눈이 멀었지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끈질긴 믿음과 신뢰도 대단하였지만 아내 안나의 과묵한 헌신도 대단하였습니다. 이처럼 토빗도, 그의 아내도 하느님 앞에서 고결하고 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독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토빗의 아내 안나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하고 남편에게 항의하며 쏘아붙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자선의 결과가 고작 눈이 먼 것이냐는 뜻입니다. 토빗은 그 말에 탄식합니다.
이와 같이 주인이 선물로 준 새끼 염소를 도둑질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남편을 안나는 야속하게 생각하면서 하느님마저 원망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듯한 남편의 외곬의 삶을 묵묵히 내조하던 아내의 모습은 이처럼 애처롭다기보다는 숙연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침묵은 분명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더 큰 일을 하시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라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도 유배지에서 흠 없이 살았습니다(토빗 3,15 참조). 그런데도 일곱 번이나 남편을 잃는 불행을 당하고, 집안의 여종들은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라도 죽도록 괴로워합니다.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토빗이나 사라에게는 불행을 당한 일보다 모욕이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옳게 살았음에도 어처구니없이 불행을 당했는데 오히려 세상이 그들을 모욕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잣대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굽은 자로 보면 똑바른 선도 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자선으로 얻은 것이 없다고 토빗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요? 남편의 죽음이 사라의 탓인지요? 문제는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먼 유배지에서 살아가는 토빗과 사라의 운명은, 정의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자선이나 선행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소원대로 그들의 목숨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천사를 보내 주십니다. 그들이 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게 병이 되어서야   반영억 신부 

사무실에 난을 키웠습니다. 일주일에 물 한번 주고 가끔 영양제도 주며 이른 아침 꽃향기를 즐겼습니다. 미국교포사목을 하면서도 침실에 화분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난은 힘을 잃더니만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왜 죽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평상시 하던 대로 했는데….죽을 이유가 없는데 하며 죽은 난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화분 밑바닥에 물 빠짐 구멍이 없었습니다. 물이 잔뜩 담겨있으니 난이 견뎌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밑바닥이 꽉 막혀있는 화분은 없습니다. 저는 제 상식에 갇혀서 난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은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에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영원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 부활을 희망하기에 오늘을 감당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어떻게 대면하게 될지 모르는 신비의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며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최선에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이 없이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활>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이 말씀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 12,18)에게 하신 말씀인데, 뜻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있다.

2.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3. 모든 사람이 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4.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를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고,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하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묵시 20,11-15).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 부활하고, 어떤 사람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루카 20,35)" 이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게 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인연, 관계 등을, 또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본성, 본능, 욕망 등을 모두 초월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완전한 해방과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일곱 형제와 살았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3)" 라는 질문을 했었습니다. 이 질문은, "만일에 부활이 있다면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일에 있다면 그 '삶'은 '이승에서의 삶'의 연장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다고 해도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살던 그대로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부활을 안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은 사실은 신앙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 바라보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현세의 복만 바라는 미신, 또는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 부활과 내세를 믿는다고 해도, 단순히 이승에서의 삶이 연장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역시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실제로 부활이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부활하지 않겠다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가난과 질병과 여러 가지 억압과 차별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는데, 부활한 후에도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부활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활 후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희망하는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부활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하느님 나라, 그런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우리도 가끔 한 번쯤은 생각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가족을 가족으로 만날 수 있을까? 만나게 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알아보고, 기억하고, 또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만일에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그래서 가족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또는 먼저 떠나서 저쪽 세상으로 가 있는 가족이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가족을 잊어버렸다면?

여기서 우선 '기억'에 관한 문제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저쪽 세상에 간 사람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지옥에서의 형벌도, 연옥에서의 보속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하고 있어야 후회를 하든지, 보속을 하든지 할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당연히 자기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기억할 것이고, 자기와 그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다음에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지상에서의 모든 인연과 관계를 초월한다는 말씀은, 모든 인연과 관계가 다 끊어진다는 뜻도 아니고, 기억이 다 지워진다는 뜻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지상에서 사랑했던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금방 서로 알아볼 것이고,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고, 참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행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아주 많이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마르 12,25)

여러분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또다시 살고싶나요?
다시 태어나면 지금과 똑같은 직업을 갖고 싶나요?

저는 장가를 못가봤으니 장가를 한번 들고싶네요.
다시 사제가 되고 싶고 수도자가 되고 싶은데
더 멋지게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면 다시 그렇게 살고싶을 거고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그럴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너무 지긋지긋해서
다시 그런 실수(?)는 하고싶지 않다 할 수도 있고
다른 경험도 해보겠다는 호기심에 지금처럼 살지 않겠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근데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가정은 사실 쓸데없는 생각이 아닐까요?
예수님 말씀같이
그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잘 삽시다.
그때가서 그렇게 하겠다 하지말고
지금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배우자와 가족,
친구와 지인들에게 잘 합시다.
그러다보면 천사가 되어있을 겁니다.
하늘에서 누리게 될 복락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운을 얻게 될 겁니다.

그리되면
나의 눈에는 온통 천사들이 보이고
살아있는 성인들이 보이고 부처들이 보일 겁니다.

오늘 천사와 성인과 부처를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6.03.|작성자 알타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연중 제9주간 금요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 12,35-37)15.06.05조회 44[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웃사랑 (마르 12,28ㄱㄷ-34)15.06.04조회 45[연중 제9주간 수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마르 12,18-27)15.06.03조회 46<연중 제9주간 화요일>하느님의 것, 황제의 것 (마르 12,13-17)15.06.02조회 46[연중 제9주간 월요일](2015. 6. 1)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마르 12,1-12)15.06.01조회 236[연중 제8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권한 (마르 11,27-33)15.05.30조회 457[연중 제8주간 목요일] 바르티매오 소경치유 (마르 10,46ㄴ-52)15.05.28조회 45<연중 제8주간 수요일>제베대오의 두아들 (마르 10,32-45)15.05.27조회 48[연중 제8주간 화요일]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기념일 (마르코 10,28-31)15.05.26조회 90<연중 제8주간 월요일>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마르 10,17-27)15.05.24조회 45[부활 제7주간 토요일]참된 증언 (요한 21,20-25)15.05.23조회 45[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따라라.” (요한 21,15-19)15.05.22조회 47[부활 제7주간 목요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15.05.20조회 44[부활 제7주간 수요일]진리로 거룩하게 (요한 17,11ㄷ-19)15.05.20조회 45[부활 제7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 (요한 17,1-11ㄴ)15.05.18조회 111[부활 제7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29-33)15.05.18조회 112[부활 제6주간 토요일]청하여라 (요한 16,23ㄴ-28)15.05.16조회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