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2015. 6. 11. 목)(마태 10,7-13)

2015. 6. 11. 오전 6:38:32

글자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2015. 6. 11. 목)(마태 10,7-13)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21ㄴ-26; 13,1-3
그 무렵 21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디다케(Didache: 12사도 가르침)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라는 한마디가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도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착함이 바르나바 사도의 두드러진 면모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이 어떤 사람들을 착하다고 하는지 살펴보니, 과연 바르나바는 그런 말을 들을 만합니다.
사도행전에 소개된 그의 착함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바르나바는 말하자면 “보내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안티오키아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착한 바르나바는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다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고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자신을 내어 줄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둘째로, 그는 다른 사람을 옹호하고 성장하도록 키워 줍니다. 회심한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다른 사도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믿지 않지만 바르나바는 그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아울러 안티오키아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다시 그가 나서서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데려옵니다. 성령의 파견을 받아 둘이 선교 여행을 떠나지만 이제부터 주도권은 바오로에게 넘어갑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이 이제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바뀌고 바르나바는 보조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제2차 선교 여행 때는 요한 마르코를 데려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오로와 충돌합니다. 바오로는 마르코가 중간에 복음을 전하러 함께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더 이상 그를 데려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함께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여하튼 바르나바는 마르코 문제로 바오로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사도 15장) 그가 바오로를 위해 중재해 주면서 인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착한 사도 바르나바! 그는 ‘파견된 사람’인 ‘사도’의 모범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미사 입당송과 본기도의 청원 내용도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고 성령이 충만한 복된 사람이며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한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착하고 훌륭한 사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우리도 착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     송영진 모세 신부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이 말씀을 한마디로 줄이면 "복음을 선포하여라."인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할 때 '말로만'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도 함께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와 평화와 희망을 주는 것, 그 '사랑의 실천'도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란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라는 명령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로만'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준다면, 그것은 복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을 "교회란 어떤 곳인가?", 또는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저' 받아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저' 받는 사람이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받을 때 이미 '거저' 받았기 때문에 복음 선포와 사랑 실천을 할 때에는 대가를 요구해도 안 되고, 어떤 조건을 붙여도 안 됩니다. 물질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안 되는 일입니다. 또 만일에 믿는다는 조건으로 사랑을 준다면, 또는 사랑을 주었으니 믿으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믿기 전에는 사랑을 조금만 주고, 믿으면 더 많이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이고 무제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거저' 라는 말이 중요하지만, "주어라." 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주는 곳'입니다. (신앙인은 기본적으로 '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교회는 거두는(받는) 곳이 아니라 베푸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이 말씀에서 '평화'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총과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는 참 평화를(은총과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에서 '그 집'은 '모든 집'인데, 사도들을(복음을 전하는 신앙인들을) 받아들이는 집일 수도 있고, 거부하는 집일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이라는 말은 어떤 자격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차별적으로 평화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예수님의 평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들은(신앙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평화를 빌고, 예수님의 평화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누릴 수 있습니다. 


'마땅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사도들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과 평화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평화를 대신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뜻입니다. 책임은 주는 것을 안 받겠다고 거부한 쪽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평화' 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의 평화' 라고 표현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도들은(신앙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평화를 받아서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평화'는 곧 '우리의 평화'입니다. 이 해석을 바탕으로 해서 풀이하면, '너희의 평화'는 "내가 준 것을 받아서 이미 너희의 것이 된 그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사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이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이미 예수님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 평화는 이미 자신의 평화입니다. 


'너희의 평화' 라는 말을,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안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평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고, 이미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복음 정신, 믿음, 희망, 사랑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12사도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사도 11,24)

많은 신자들께서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가까운 가족이 냉담하거나
아예 성당에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싶은데
아무리 기도해도
잘 안 된다고 울상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나요?
그렇다면 바르나바에게서 배우세요.

그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네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지요.

그러니 성당 안 나간다고
기도 안 한다고
남을 탓하지 말고
먼저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겠지요.
내가 더 영적인 사람이 되고
내가 더 신앙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좀더 착하게 삽시다.
더 착하게 말하고
더 착하게 행동합시다.
조금만 더...

[출처] 2015.06.11.|작성자 알타반





성화 - 예수님 그림, 성경 그림 유럽 ~ Jesus With Children Wallpapers – Set 10 ( 예수님과 어린이 이미지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마태10,7-13)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반영억 신부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입니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없다고 합니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입니다.

이곳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있는 홍 가브리엘신부는 사제생활비 1천불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어 버림받은 어린이 10명을 데리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습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다가 공항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검진결과 “영양실조”였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지요? 신부님은 또 하나의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설에 올 수 없는 그야말로 오지에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해 살고 싶답니다. 항공요금이 비싸서 3 년에 한 번 겨우 한국에 나오면서 신부님은 말합니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해본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 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홍 신부님은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서야 하겠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교황 강론의 전문을 다음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라는 말은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여러 번 울려 퍼집니다. 평화는 강력하고 예언적인 말입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꿈이며 인류를 위한, 역사를 위한, 모든 창조물을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사람에게서 그리고 악한 존재들의 반대에 직면하는 계획입니다. 우리 시대조차도 평화를 향한 열망과 평화를 구축하고자 하는 헌신은 이 세상에 현재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현실과 부딪힙니다. 그 무력 충돌들은 조금씩 진행되는 일종의 3차 대전이며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에서 우리는 전쟁의 기류를 감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이런 기류를 선동하고 조장하기를 바랍니다. 주로 다른 문화와 사회 간의 충돌을 원하는 사람들과 무기를 팔려는 목적으로 전쟁에 투기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난민 캠프에 있는 아이들, 여성들 그리고 노인들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파괴된 집과 거리와 공장들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전쟁은 산산이 부서진 삶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얼마나 많은 파괴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경험해 왔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하느님 백성의 외침, 선의를 가진 모든 남성과 여성의 외침이 다시 한번 이 도시에서 울려 퍼져 나갈 것입니다. 결코 다시는 전쟁은 안 된다!

이 전쟁의 기류 속에서 구름을 뚫고 나오는 한줄기 햇빛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에서 울려 퍼집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오 복음 5,9) 이 말씀의 힘은 언제나 모든 세대에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설교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심지어 위선적인 방법 또는 정말로 기만적인 방법으로도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됩니다. 교황은 말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즉 그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일입니다. 열정이 있어야 하고 인내와 경험과 강인함을 요하는 일입니다. 행복하여라, 매일 매일 그들의 행동으로 자애, 형제애, 대화, 자비의 실천과 마음가짐으로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 이들은 진실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에서 평화를 씨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를 누리도록 이 세상에 그분 아드님을 씨 뿌리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것은 매일, 한걸음 한걸음 결코 지치지 않고 해나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일을 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낼까요? 예언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간결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37,17). 불가타 성서의 Opus justitiae pax(“정의의 결과는 평화”)는 교황 비오 12세가 선지자적인 영감으로 채택한 중요한 모토가 되어 왔습니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입니다. 이곳에서도 그렇습니다. 선언되고 상상하고 계획된 정의가 아닌…… 오히려 실천하는 정의, 살아 내는 정의. 복음은 우리에게 정의의 궁극적인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39 로마서 13,9).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진실로 이 계명을 따를 때 얼마나 많은 일들이 변화하는지요! 우리 자신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내 원수가 사실은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같은 마음,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을 때 내가 바라 보는 사람들. 우리는 하늘에 계신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7,12 참조)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콜로새서 3, 12- 13)

이 마음가짐들은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 가는 바로 그곳에서 평화의 아르티장(artisan,장인)이 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 이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도덕적 반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마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영과 함께 이러한 마음가짐들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기실 수 있고 우리를 그분 평화의 진정한 도구로 삼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화해되기만 한다면 인간은 평화의 아르티장(artisan,장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주님께소박한 마음의 은총을, 인내의 은총을,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일하는 은총을, 자비로워지며 평화를 위해 일하고 전쟁이나 불화가 아닌 평화를 씨 뿌리는 은총을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행복을 가져오는 길이며 이 길이 주님 축복을 받는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바티칸 라디오에서)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15.06.13조회 48<예수 성심 대축일>(2015. 6. 12. 금)(요한 19,31-37)15.06.12조회 70<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2015. 6. 11. 목)(마태 10,7-13)15.06.11조회 100<연중 제10주간 수요일>(2015. 6. 10. 수)(마태 5,17-19)15.06.10조회 48[연중 제10주간 화요일]세상의 소금과 빛 (마태 5,13-16)15.06.09조회 45<연중 제10주간 월요일>참 행복 (마태 5,1-12)15.06.08조회 359[연중 제9주간 토요일]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15.06.06조회 202[연중 제9주간 금요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 12,35-37)15.06.05조회 44[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웃사랑 (마르 12,28ㄱㄷ-34)15.06.04조회 45[연중 제9주간 수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마르 12,18-27)15.06.03조회 45<연중 제9주간 화요일>하느님의 것, 황제의 것 (마르 12,13-17)15.06.02조회 45[연중 제9주간 월요일](2015. 6. 1)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마르 12,1-12)15.06.01조회 235[연중 제8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권한 (마르 11,27-33)15.05.30조회 457[연중 제8주간 목요일] 바르티매오 소경치유 (마르 10,46ㄴ-52)15.05.28조회 44<연중 제8주간 수요일>제베대오의 두아들 (마르 10,32-45)15.05.27조회 47[연중 제8주간 화요일]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기념일 (마르코 10,28-31)15.05.26조회 90<연중 제8주간 월요일>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마르 10,17-27)15.05.24조회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