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수요일>(2015. 6. 10. 수)(마태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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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사도직에 대해 말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것은 모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 코린토 2서 3,4-11)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 하더라도 율법의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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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코린토 2서3,4-11)
형제 여러분, 4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7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8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9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복지 시설, 유치원 등 많은 사도직 시설 안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도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오로의 경우 그가 사도라는 자격을 입증해 주는 것은 코린토 신자들과 그들의 모범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추천서나 자격증이 아니라 자기가 선포한 복음 내용을 코린토 신자들이 흔쾌히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자신이 사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이 사도의 자격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가 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오로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신자가 된 이들 때문에 자기가 사도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실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된 이’를 뜻하기에, 파견 없이 자기 스스로 일한 사람의 업적 자체가 그를 사도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도직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유치원 교사 자격이 있어서 유치원 사도직을 하면, 그 자격증은 그가 유치원 교사를 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사도직’, 사도로서 하는 일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일을 하시더라도, 그가 아무것도 자기 업적이라고 내세우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파견된 사도의 일이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는 작은 일들이, 나를 보내신 분께서 하시는 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어느 일이건 그것이 내가 한 일이라고 애착을 갖거나 붙잡지 않고 바오로처럼 언제라도 빈손으로 떠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유다교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율법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효하기 때문에 설령 개종을 하였다 하더라도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율법의 근본정신이 준수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근본정신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법조문에 구애받으면서 표리부동하게 살아가는 바리사이적 삶이 아니라 유연하고 느슨해 보이면서도 정직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삶이며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 모세 신부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는 "하느님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하거나 어기고"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죄로 지적된 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한 죄, 계명을 어긴 죄, 계명을 어겨도 된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 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또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것을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 덜 중요한 계명은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계명들을 분류하고 판단하면서 서열을 정하기도 하고, 중요도를 논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할 때에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계명들은 무시하면서 안 지키고, 그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죄의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계명들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면, 십계명의 순서를 흔히 중요도의 순서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런 생각은 근거가 없습니다. 열 개의 계명은 모두 똑같이 중요하고, 그래서 모두 똑같이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가 더 중요하고, 후반부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역시 근거가 없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먼저 말씀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나중에 말씀하신 것은, 먹고사는 일보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해석대로라면, '일용할 양식'을 먼저 말씀하시고 '용서'를 나중에 말씀하셨으니 '용서'보다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그런 해석 자체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해석입니다. 십계명이든지 주님의 기도든지 간에 그 내용의 순서는 중요도의 서열이 아니라, 가르침의 순서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것을 어긴다면, 하느님의 계명을 마음대로 판단하는 죄와 계명을 어긴 죄를 함께 짓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자기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쳐서 같은 죄를 짓게 만든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든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든 죄'에 대해서는 아주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 배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보다는 '작은 이들'일 것이고, 잘 모르니까 배워야 하는 이들일 것이고, 가르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옳다고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일 것입니다. 잘못 배워서 계명을 어겼더라도 죄는 죄인데, 그런 경우에 배운 사람의 죄보다는 가르친 사람의 죄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흔한 예가 '금육재'를 지키는 문제입니다. 가끔 명절 같은 때에 교구장이 금육재를 관면한다는 공지를 발표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명절이라서 부득이하게 금육재를 지키지 못했더라도 고해성사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금육재를 지키지 마라." 라는 명령도 아니고, "고기를 먹어라." 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아무리 명절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진짜로 지킬 수 있다면...) 그런데도 "교구장님이 관면했으니 고기를 먹어라." 라고 강요하듯이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율법주의는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랑도 없이, 규정 자체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이고, 사실 율법주의도 '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왜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 주셨는지, 그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제대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금육재를 왜 지키는가?" 금육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그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이고, 또 가난한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 절제하고 극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명절이라도 그 뜻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정성'으로 이어집니다. 사랑 없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대충 지킬 것이고, 정말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정성을 다 쏟아서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사랑과 정성을 율법주의라고 깎아내리면 안 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코린 4,6)
아니 우리 이모가
사람을 죽인다고요?
언젠가
우리 수사님 한분의 우스게 소리가 기억납니다.
이모님 성함이 '문자'라네요.
그럼 탈렌트 '김성령'이가 사람을 살렸다구요? ㅎㅎ
말씀묵상을 하면서도
성경 글자 하나하나에 매여
자구적 해석을 하다보면 엄청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 정신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십니다.
613개 율법조항을
지켰다 못지켰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너무 말마디만 따지지 맙시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흥분하기보다 그 말의 속 뜻을 새겨보면 어떨까요?
성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말과 모범으로 돌려드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부디
이 말씀묵상이 여러분을 죽이는 도구가 되지 않고
살리는 도구가 되길 간절히 빕니다.
[출처] 2015.06.10.|작성자 알타반

지난주에는 교구청 마당 공사가 있었습니다. 일하시는 분들이 빨간 벽돌로 조적을 하였습니다. 하나의 벽돌은 아름다운 바닥이 되었고, 벽이 되었습니다. 바닥은 3번 작업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콘크리트를 치고, 다음에는 방수액을 바르고, 그 위에 또 콘크리트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래를 펼치고, 보도 불럭을 깔았습니다. 벽을 쌓을 때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닥을 정리하고, 수평을 맞추고, 정성껏 벽돌을 쌓아갔습니다.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들이 정해진 작업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작업 공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바닥은 방수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벽은 금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주고 있는 ‘메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에 대응을 잘 하였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매뉴얼이 있음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환자들이 있었던 병원을 공개했으면 의혹과 혼란은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모임들은 취소되었고, 학교는 휴교를 하게 되었고, 시장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었고, 관광객들은 여행일정을 취소하였습니다. 아무런 잘못 없이 격리가 되고, 확진 환자가 된 분들의 고통은 말 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작은 것이지만 원칙과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위한 많은 법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규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들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반영억신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변하나 정리 못하면서 어떻게 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