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는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 기념일이었는데, 1996년부터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시온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패망한 시온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다시 회복시켜 주시며, 구원과 의로움을 지니게 하신다.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업적을 본 모든 민족들은 주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이사야서 61,9-11)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떠났는데,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흘 만에 다시 찾는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아드님의 대답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루카 2,41-51)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 성심과 마찬가지로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그분의 인격을 지칭하며, 성모님의 인격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오늘 복음에서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시야 임금 시절부터 열세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은 민족의 고유 명절인 파스카 축제, 초막절, 오순절 등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 했는데, 순례를 하는 동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남자 쪽에서, 요셉은 그가 여자 쪽에서 돌아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나자렛에 가까이 다다랐을 때에 부모는 소년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다시 상봉하였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일성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였습니다. 이에 대해 소년 예수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에 앞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에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그 아기에 대하여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는데, 이때 다른 이들은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놀라워하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라고 루카 복음은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마리아는 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을까요? 버릇이 나쁜 아들을 교육시키려고 기회를 보면서 마음에 고이 간직했을까요? 분명 아니지요!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자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일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조용한 삶, 숨겨진 삶을 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 안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역할은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잔치에서 모두들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니 잔치의 전체 흐름을 볼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술이 떨어진 사실도 모르고 있었지만, 성모님은 전체를 보고 계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들 예수님께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처럼 전체를 보려면 묵상과 관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앞만 바라보면서 내달리려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되새기기 위하여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유와 관상의 시간이 절실한 요즈음입니다. 아울러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상하도록 이끄는 요람이라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
기쁨> 송영진 모세 신부
'성모 성심'은 '성모님의 사랑'을 뜻하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리킵니다.
1) 성모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실제로는 종이 아닌데도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신도 원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요구 조건도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뿐입니다.
성모님의 사랑과 정반대쪽에 이기적인 기복신앙이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데, 기복신앙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어떤 복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섬깁니다. 청하는 것은 많은데 감사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습니다.
2)
성모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크면 고통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가신(요한 19,25)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보다 더 컸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짐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어머니의
고통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예수님
말씀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라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나를
따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따르게 되고, 함께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성모님을
본받아서 '삶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성모님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라간 사람들이지만, 성모님을 사랑해서, 또 성모님을 본받고 따르기 위해서, 성모님과 함께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
성모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실 때 하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랑.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었다가 찾았을 때 하신 말씀이지만,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대로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을
받는 일보다는 속세의 인생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사랑)은 '애타는 마음', 또는 '안타까움'입니다. 살
길을 외면하고 죽을 길로만 가는 자녀들을 보면서 어머니로서
애가 타는 마음이(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바로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때서야 자신의 불효를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후회'는 너무 늦은 뉘우침입니다. 효도를 하려고 해도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한 효도는,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하는 것은 죽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하면 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후회'는 지옥에 간 사람들이나 하는 일입니다(루카 13,28).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는데(마태 27,3), 그
다음에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살하기 전부터 이미 지옥에
가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후회만
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은,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한 뒤에 후회만 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안타까움(애타는 마음)'의 반대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 그
제자들은 일을 마친 뒤에 기뻐하면서 돌아왔고(루카 10,17), 그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셨습니다(루카 10,21). 바로
그런 '기쁨'입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이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요한 3,29).
"지금 나의 '삶'은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인가?"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저는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자식 키우기가 만만찮죠?
내 맘대로 못하는 게 자식이지요?
그래서 때론 '무자식 상팔자'라고 생각들 합니다.
오늘 잃어버린 아들을 사흘만에 찾아
애타하며 어디 있었냐고 묻는 엄마 앞에서
"왜 저를 찾았나요?
제가 성당에 있는 줄 모르셨다니요." 하는 자식,
기가 막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내 자식은 사실 내 자식이 아니랍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고 하느님의 자식이지요.
내 자식인 것보다
하느님 자식인 것이 더 낫지 않아요?
자식이 내 맘에 안 들 때나 내 뜻을 따르지 않을 때
그것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거나 괴로워하진 마세요.
내 자식이 아니니까요.
하느님께 "당신 자식이니 당신께시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맡기십시오.
오늘 나의 자녀들을 다시한번 바라봅시다.
내 자식이기에 앞서 하느님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자녀이니 귀한 눈으로 바라봅시다.
귀한 자녀를
나에게 맡겨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십시오.
[출처] 2015.06.13.|작성자 알타반
어제는 사제성화의 날이었습니다. 교구의 신부님들은 명동 성당에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드봉 주교님의 강의를 들었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사제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제들이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예수님에 관해서, 하느님에 관해서 강론을 하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예수님을, 하느님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은 시집을 오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시집살이가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것처럼, 말 못하는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내면서 시집살이를 견디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요즘이야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들도 없고, 결혼을 앞둔 여성들도 대부분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시집살이를 할 시간도 거의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시댁의 식구들과 함께 사는 경우도 거의 없고, 따로 살림을 살기 때문에 시집살이를 할 기회도 별로 없습니다. 시집살이가 고되고 힘든 면은 있지만, 그런 시집살이를 통해서 한 집안의 전통을 배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다듬이 소리처럼, 가을 풀밭의 귀뚜라미 소리처럼, 논두렁의 개구리 소리처럼 예전에는 익숙했던 것들이 지금은 귀한 소리가 되고 있습니다. ‘시집살이’라는 말도 앞으로는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어머니의 마음을 보면 성모님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늦게 들어오시는 남편을 위해서 밥 한 공기를 이불 속에 넣어두는 마음, 말썽 부리고 공부도 잘 못하는 둘째 아들 때문에 걱정이지만 언젠가 사람 구실을 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 남은 반찬과 찬밥을 물에 말아 드시는 알뜰한 마음,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서 새마을 일을 하지만 남편이 곧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믿어주는 마음, 결혼한 자녀들이 찾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고 남은 것을 정성껏 싸 주시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예전에 본당 신부님들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도 본당 신부가 되어 바라!’ 본당 신부가 되면 모든 것이 편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본당 신부가 된 다는 것은 더 많은 희생과 책임을 어깨에 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보좌신부로 지낼 때는 ‘화장실 문고리가 고장 난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칠판에 아이들이 써넣은 낙서도 그냥 보았습니다. 마당에 떨어진 휴지도 그러려니 하였습니다. 소성전에 성수물이 떨어진 것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본당 신부가 되면 마음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도 시집가서 꼭 너 닮은 딸 하나 낳아 봐라!’
성모님은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깊고 넓어서 모든 것을 품어 주시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어머니의 마음도 그렇게 깊고 넓어서 가족들의 모든 아픔과 고민을 말없이 품어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