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월요일]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8-42)

2015. 6. 15. 오전 6: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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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월요일]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8-42)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환난과 박해를 묵묵히 견디어 냄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흠잡을 데 없는 일꾼으로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든 모욕을 받든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 앞에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점이 다른 이들을 부유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코린토 2서  6,1-10)

복음에서는 구약의 가르침을 완성시키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소개된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달라는 사람에게는 청하는 것 이상으로 베풀라고 말씀하신다.(마태오 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서로 사랑하여라

<폭력을 포기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구약시대의 '동태복수법', 즉 과잉 복수를 하면 안 되고, 복수를 하더라도 당한 만큼만 해야 한다는 율법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적인 복수를 아예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공적인 사법제도를 부정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은, "악인에게 앙갚음하지 마라."입니다. 그래서 '악에' 맞서는 일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악에 맞서는 일은 해야 합니다. 단,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합니다. (악에 맞서는 것과 악인에게 맞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우리가 물리치고 제거해야 할 것은 '악'이지, '악인'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죄는 미워해도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 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의 장면과 바로 연결됩니다.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뺨을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 대신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대기는커녕 화를 내셨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가르침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경비병에게 화를 내신 말씀이 아니라, 그를 부드럽게 타이르신 말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악에 악으로 맞서지 말고, 선으로 악을 극복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 그 경비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니면 반대로 더 심한 폭력을 가하려고 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 경비병의 반응을 모릅니다. 어떻든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만 보면, 그 경비병이 더 심한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없이 뒤로 물러선 것 같습니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했다면, 그것은 회개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이 말씀은 '적극적인 사랑으로' 악을 물리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악을 그냥 내버려 두라는 가르침도 아니고, 당하기만 하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악행을 소극적으로 참고 견디기만 하는 것은 '비겁한 굴종'입니다. 비겁한 굴종은 선이 아니라 악을 더 키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힘없는 사람이 힘이 없어서 당하기만 할 때, 또 참고 견디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양들을 둘러싼 이리 떼처럼(마태 10,16) 선한 사람들의 힘보다 악한 사람들의 힘이 더 크다면, 그리고 그 악한 힘이 더욱 커지기만 해서 아무리 선으로 악을 물리치려고 애를 써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제로 선한 사람들의 선, 사랑, 자비보다 악한 사람들의 폭력이 더 강할 때가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선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악의 힘은 사탄에게서 오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선의 힘이 악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하느님 쪽에, 즉 선 쪽에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악한 사람들의 힘이 더 커서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악한 힘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굴복하면 지금 당장 몸은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반대쪽에, 즉 사탄 편에 서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왜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맨날 고난을 겪고, 왜 악하고 힘센 사람들은 항상 잘 먹고 잘 사는가? 하느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왜 내버려 두시는가?"

이 질문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지금 겪는 고난은 승리자이신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한 과정이 됩니다.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힘'이라는 말은 세속적인 힘을 가리킬 뿐이고, 그런 힘은 하느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 낫습니다.

반대로, '악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고, 지금은 힘이 센 것처럼 보여도 그 힘은 사탄의 힘일 뿐이고, 그 힘을 쓰는 것은 멸망을 향해서 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런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악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2베드 3,9). 그러나 무한정 기다리기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심판하실 것이고, 그때에는 모든 일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선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이 선을 포기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모든 것을 전부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연중 11주간 월요일(마태5,38-42)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반영억 신부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quot;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quot;(신명, 6,5)

오늘 복음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사랑하려면 무조건 양보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대항하지 않고 무엇이나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악한 것을 개인으로부터 또 이 세상에서부터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앙갚음하지 말라고 하셨지,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앙갚음하지 말라는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악한 행동을 하니 당연히 나도 상대방을 악하게 대하는 복수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도망치거나 악과 타협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공세를 말합니다. 곧 증오를 사랑으로, 악을 선으로 대항하라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 내용대로 미움을 선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모욕을 기도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행위는 악을 용납하거나 악과 타협하는 물렁물렁하고 나약한 태도가 결코 아니라, 선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진리와 정의를 증언하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악과 악을 행하는 자를 구별하기 때문에, 악에는 끝까지 대항하면서도 사람만큼은 끝까지 사랑합니다. 악에 대항함으로써 그는 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를 구출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악에 대항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저 참고 묵묵히 얻어맞고만 있어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산적으로 볼 때 실제로 상당한 손해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공세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사랑의 공격은 악에 대한 저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왼뺨마저 돌려 대는 사랑의 공격으로 “네가 나의 오른뺨을 친 것은 악한 행동이었다.”는 잘못을 깨닫고 느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건망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화기를 냉장고에 넣고서 한참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도 조금씩 건망증이 생기는 것을 실감합니다. 며칠 전에는 안경을 썼으면서도 안경을 찾기도 했습니다. 메모리 카드를 가지고 사무실로 가야하는데 엉뚱한 것을 들고 사무실로 가서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더러 있습니다.


꽃이 지는 것은 분명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꽃이 지지 않는다면 이는 살아있는 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고, 자라지만 병이 들고 늙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건망증이 생긴다는 것은 좀 더 세상을 겸손하게 살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이제 가까이 있는 것을 좀 더 살피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허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한 것은 이제 주위에 있는 아픈 사람과 외로운 사람을 바라보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 매일 선행을 베푸는 것,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닙니다. 조금씩 실천을 하면,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시도해 보면 어느덧 신앙인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양심을 팔아넘기고, 폭력을 행사하고, 사기를 치는 것은 별나라에 사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양심을 속이면, 세상의 것들에 물이 들면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원래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게 살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하게 살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법과 하느님의 법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물질,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경쟁과 싸움에서 승리를 해야만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1등은 기억하지만 2등은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은 많은 능력과 자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행복은 성적순, 능력순, 명예순, 권력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법에는 낙오자가 생기고,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양보, 겸손, 희생,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행복은 물질, 명예,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서로 나누기만 한다면 우리가 모두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듯이, 우리의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사람들 모두는 하느님의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룬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병든 사람을 내 몸처럼 돌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신앙의 법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법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법을 따라서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물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좀 더 참고 인내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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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2코린 6,10)

여러분은 부자인 것처럼 보이고 싶나요?
그래서 명품백에 좋은 차를
큰 아파트와 많은 패물을 갖고 싶나요?
그러면서

실은 자신도 가난하고
다른 사람도 가난하게 만들고 싶나요?
많은 것을 갖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빈털털이 빚쟁이가 아닌가요.

여러분은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알부자시죠?
그래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어 주시지요.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실은 많은 것을 갖고 계시지요?

진짜 부자들은
표시를 잘 내지 않더라구요.
졸부들은 어설프게 드러내려 하더라구요.
진짜 식자들은
어눌해 보이지요.
가짜 식자들은 잘난 체 말이 많더라구요.

오늘 내가 받은 것을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눔으로써
참 부자가 되고
다른 이들도 부자가 되게 하시길 축원합니다.

참으로  알부자이신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출처] 2015.06.15.|작성자 알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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