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2015. 6. 24. 수)(루카
1,57-66.80)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얀 브뤼겔 작품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고백하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인 세례자 요한의 인도를 따라, 유일한 빛이요 구원이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종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말한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그에 대한 계획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그가 한 일이 헛수고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소중하다.(이사야 49,1-6)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음을 전한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한다.(사도 13,22-26)
복음에서, 요한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따라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심을 알아본다.(루카1,57-66.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루카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 모든 사람이 그를 훌륭한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을 때, 자기는 종말에 나타나기로 한 엘리야가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며, 메시아는 더욱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은 그가 “나는 그분이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밝힌 데에 있습니다. 스스로 작아질 줄 알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겸손하게 자기의 신원을 밝혔는데, 소리의 속성은 한 번 울리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이지요. 물론 소리도 감명을 줄 수 있지만 소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오직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는 세례자 요한의 겸허한 고백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기가 상승하며 절정에 도달하였을 때, 요한은 자기가 메시아가 아님을 천명한 뒤, 악을 쳐 이기고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어린양을 자기 제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이도록 그분을 알려 주었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뵙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섭섭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적인 섭섭함을 조용히,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디아의 딸의 춤값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은전 30냥에 팔리신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값싼 죽음을 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의인, 성인들의 죽음도 이와 비슷하지요.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작아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의
탄생과 메시아의 강생> 송영진 모세 신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한 말을 보면,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말입니다(루카 1,12-17.19).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사실상 메시아 강생 예고라는 것입니다.
그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되었던 즈카르야는 요한의
할례식 때 말을 하게 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데(루카 1,64), 아마도
그 찬미를 기록한 것이 '즈카르야의 노래'일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예언하는 내용도 들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 일과 메시아의
인류 구원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루카 1,67-79).
이런
내용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단순히 나중에 예언자가 될 아기의 탄생이 아니라 메시아의
일을 준비할 일꾼의 탄생이고, 메시아
강생의 서막과도 같은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은 예수님의
성탄절의 전야제와 같은 날이 되고,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신 일을 경축하는 일이 됩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탄생을 보고 미래의 행복과 평화를 찬미한다는 점에서 구약시대
'노아'의 탄생이 연상됩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라멕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가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수고하고 고생하는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창세 5,29)." 라멕의
말은 즈카르야의 노래의 후반부에 있는 예언과 비슷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6-79)."
라멕의
'수고하고 고생하는 우리' 라는 말은 즈카르야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이라는 말과 연결되고, '위로'
라는 말은 '용서, 구원, 자비, 평화' 라는 말과 연결되고,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이라는 말은 '죄, 어둠, 죽음'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라멕의
말과 즈카르야의 노래는, 하느님은
사람들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노아의
탄생은, 대홍수로 전멸 당할 위기에 놓여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방주를 만들 사람을 보내주신 '자비'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죄와 죽음으로 멸망당할 상황에 놓여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주신 '자비'이고, 요한의
탄생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세주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일꾼을 미리
보내주신 '자비'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그
구원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지금 우리가 할 일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라는 구절이 특별히 눈에 뜨입니다. 이
구절에서 별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연상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메시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다는 말을 했는데(마태 2,2), 이
말은 메시아의 탄생을 증언하는 말과 같고, 사람들을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마태 2,3),그들
가운데에는 메시아를 보러 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별'을(빛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6-7)." 요한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요한의
말은 "나를 보지 말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아라." 라는 뜻입니다.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요한의
탄생이 아니라 메시아의 강생을 찬미한 것도 사람들에게
요한이 아니라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요한만 보고 메시아를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을 때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함께
기뻐했습니다(루카 1,58). (함께
기뻐했다는 말은 축하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엘리사벳이 받은 은총만 보고 자기들이 받은 은총은 보지 못했는데, 자기들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 알았더라면 아마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루카 7,16)." 라고 말하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천여 년 전에 잠깐 활동하다가 순교한 옛날 예언자이지만, 그가
선포하고 증언한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우리는 항상 회개하면서, 하늘나라를 향해서 잘 걸어가야 합니다. 요한이 말한 '주님의 길'은 당시에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위한 길'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우리를 앞장서 가시는 주님을 잘 따라가기 위한 길'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주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는 일이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숙소에 있는 컴퓨터의 인터넷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안 되고, 텔레비전을 못 보는 주말은 조금은 짜증나고 우울한 날입니다. 다행이 어제 전산실에서 왔고, 통신사 직원이 와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가끔 약속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이 또한 감사할 일들입니다. 무리한 일정 때문에 몸이 피곤했는데 상대방이 그런 저의 사정을 아는 것처럼 약속을 연기할 때가 분명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도 약속을 어긴 적이 있습니다. 교구청에 있으면 교구청에서 생기는 일들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함께하는 일에 혼자만 빠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득이 양해를 구하면 다들 이해해 주시곤 합니다. 이번 주에도 교구의 일 때문에 두 개의 모임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들었던 것처럼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삶의 태도입니다. 지난 주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 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 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조재형 신부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사도 13,25)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은
그가 가진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겸손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 사람이 가진 달란트 때문에
유명한 인물이 된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겸손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능력이나 재주가 많은 사람은
소위 "꾼"이 되기 쉽지요.
남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인기가 떨어져
패인이 되다시피하는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혹시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그가 자신을 살짝만 속이면
메시아처럼 추앙을 받았겠지만
자신은 메시아가 아닐 뿐더러
그분의 종도 못된다고
진솔하고도 겸손하게
자신을 고백합니다.
그런 인물이 진짜 위인이지요.
예수님마저도 인정하시는
참 대인입니다.
오늘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들 앞에
진솔하고도 겸손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나의 겸손의 깊이만큼
나는 예수님의 참제자입니다.
[출처] 2015.06.24.|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