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월요일>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1-5)
오늘부터 창세기의 성조사를 묵상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인 성조사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길을 떠난다.(창세기12,1-9)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찾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신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되질하는 그 되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아주 쉽게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쉽게 형제를 판단하지만 자신에게는 더 큰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마태오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오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길 사람 속보다 더 알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대부분 이 말씀을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남을 판단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또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판단을 받음으로써 고통당해 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말고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것, 수십 년 동안 들어 온 말씀이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사람들과 여러 해를 살다 보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상관없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것이 언제나 옳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중 얼마만큼은 사실 틀린 판단이 아니기도 합니다. 직책상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평가하고 식별해야 하는 경우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점은 쉽게 크게 눈에 들어옵니다. 좋은 면들도 물론 보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자신의 부족한 점은 그만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에도 분명 잘못된 아집이나 편견도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은 마치 흰옷에 묻은 얼룩처럼 쉽게 눈에 보이는데 자신의 그릇된 점은 털 속에 숨은 먼지처럼 안 보일까요?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 있는 티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보다 커 보일까요?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나의 들보를 발견하고 빼내는 일은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것을 완수할 때까지는 형제의 눈에 든 티에 대한 너그러움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내 눈에 든 들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말아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어느 누구도 남을 판단할 만큼 선하지 않다는 점일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다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나중에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
도와주면서 구원을 '함께'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리는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일도 하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만심에 빠지는 것과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 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를 거꾸로 표현하면, "남을
심판하면 너희도 심판받는다."인데, 이 말은, 좁은 뜻으로는, "남을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심판한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 하느님께서도
너희에게 사랑과 자비를 주실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이미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주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시고 인간들을 지켜보시기만 하다가 인간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면 너희도 심판받는다." 라는 말의 실제 뜻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는 것은, 너희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 거부하고, 심판받기를
선택하는 것이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요한 3,17). 그래서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함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 하느님께서도
너희에게 사랑과 자비를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의 실제 뜻은 "하느님께서
이미 너희에게 사랑과 자비를 주셨으니 너희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용서, 사랑, 자비는 모두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즉 우리가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 이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앞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이
말씀에서 '티'는 작은 결점이나 실수를 뜻하고, '들보'는 '큰 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자신의 큰 죄를 깨닫지 못하고(또는 감추고) 다른
사람의 작은 결점과 실수를 지적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는 어떤 특정 인물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너 자신을 먼저 반성하여라. 너 자신부터 회개하여라." 라고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
가운데에는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진짜로 모르는 위선자가 있고, 알면서도
없는 척 하면서 감추는 위선자가 있습니다. 내가
위선자라는 것을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다면? 그러면
옛날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될 것입니다. 모르고
있다는 점만 생각하면, 이 경우는 '위선'보다는 '어리석음' 쪽에 더 가까운데, 그래도
선이 아니기 때문에 위선입니다. 어떻든
양심 성찰, 반성, 회개를 게을리 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어리석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없는 척 감추는 위선자의 경우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작정한 진짜 위선자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카인',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그런
사람입니다. 카인과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끝까지 속이려고 하다가 벌을 받았는데, 만일에
그들도 뉘우치고 회개했다면 그렇게 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고
있다가 깨닫고 바로잡는 것도 회개이고, 감추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고백하고 바로잡는 것도 회개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들은 형제적
충고나 권고나 훈계 등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충고나
권고나 훈계도 이웃 사랑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꾸짖는
것도 회개시키기 위한 일이고, 용서하는 것도 회개시키기 위한 일인데, 이것은
모두 함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형제애)'입니다.
만일에
꾸짖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안 한다면, 또 용서하기가 싫어서 안 한다면, 그래서
그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계속 내버려 둔다면, "죄를
보면서도 내버려 둔 죄(선을 행하지 않은 죄)"를 짓게 됩니다. 반대로
형제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충고할 때, 내
쪽에서 "너의 들보부터 빼내어라." 라고 말한다면("너나 잘해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형제의 사랑을 거부하고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 사회의 사법제도를 부정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교회 교도권자의 직무 수행을 부정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법과 제도와 질서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법을 집행하는 직무를 맡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지부터 반성해야 하고, 자기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3)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이 점점 침침해집니다.
눈도 자주 비비게 되고
스마트폰도 좀더 큰 걸 선호하게 됩니다.
돋보기를 써야지 사물이 제대로 보입니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보고있는 것이
정확한 실체가 아니라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연륜에 따른 경험에 의지하여
짐짓 내가 보는 것이 옳다고
고집스런 확신을 갖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눈이 그러하듯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총기도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남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고
내가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고
겸손되이 인정하게 되면
어리석은 실수를 덜 하게 됩니다.
오늘은
내가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내가 보는 시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잘못 보지 않을 테니까요.
[출처] 2015.06.22.|작성자 알타반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남을 비난하지 말라./법정스님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몇 년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