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백인대장의 믿음 (마태 8,5-17)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분을 지나가는 길손으로 여겨 맞아들인다. 하느님께서는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라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께는 하실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다. (창세18,1-15)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중풍으로 누워 있는 종을 고쳐 주시기를 청한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부당함을 알고, 주님이 말씀만으로도 종을 고쳐 주시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 이방인의 믿음은 모든 이의 모범이 된다. (마태8,5-17)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마태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어차피 모든 부탁을 다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 어떤 부류의 청을 들어주십니까?
어제 복음에서 치유를 받은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배척받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오늘은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병든 종입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유다인들의 시각을 따른다면,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유다인인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치유를 청할 자격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직접 가셔서 고쳐 주시겠다는 의지를 밝히십니다. 하지만 백인대장의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그의 요청에 따라 한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의 종이 치유됩니다. 그리고 그 백인대장은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도 뛰어난 믿음을 지녔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병자를 치유하시고 도움을 베푸시는 데에도 예수님께 어떤 우선순위가 있다면, 첫 번째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이었습니다. 도움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먼저 구원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한 성모님의 찬미가가 그 우선순위를 잘 보여 줍니다.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사람이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하여 나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무엇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이 세상에 넓혀 나가는 데에, 오늘 나의 관심과 노력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의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그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물러가라고 명령만 하셔도 병이 고쳐진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직접 만나시지 않아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 또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백인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이
말씀은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인데, 이
말씀만 놓고 보면,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 백인대장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신 말씀이 됩니다.
열왕기
하권을 보면 엘리사 예언자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그는 주님께 기도드린 다음, 침상에 올라가 자기 입을 아이의 입에, 자기
눈을 아이의 눈에, 자기 손을 아이의 손에 맞추고 그 위에 엎드렸다. 이렇게
아이 위에 몸을 수그리고 있자,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였다. 엘리사는
내려와서 집 안을 이곳저곳 한 번씩 걷더니, 다시
침상에 올라가 아이 위에 몸을 수그렸다. 그러자
아이가 재채기를 일곱 번 하고는 눈을 떴다(2열왕 4,33-35)." 절차와
과정이 많이 복잡한데,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장면들을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 서서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한 번 외치시기만 했습니다(요한 11,43).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에도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라는 말씀만 하셨고(루카 7,14), 야이로라는
어떤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마르 5,41).
열왕기
하권의 이야기에서 죽은 아이를 살리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엘리사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했을 뿐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들에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권한으로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백인대장은
바로 그 권능과 권한을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내용과 비교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는데(요한 4,4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4,48). 이
말씀은 그 왕실 관리가 믿음도 없이 청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고 다시 청합니다(요한 4,49). 어쩌면
이 말 앞에 "믿겠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그는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절박함 때문에 예수님께
같이 가자고 거듭 간청하고 있습니다. 오실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해 달라고 청하는 백인대장의 말과 같이
가자고 청하는 왕실 관리의 말이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왕실 관리의 믿음보다는 절박함을 먼저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 말씀을 믿고 떠나갔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각에 아들의 열이 떨어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요한 4,50-53).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도 없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같은 말씀도 없습니다.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지적하시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을 보면, 유대인 원로들이 백인대장의 청을 예수님께 전하면서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 7,4-5)." 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신 것은 그가 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비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거나, 조건을 붙이거나 하지 않으시고, 우선순위
같은 것도 없고, 차별대우 같은 것은 더욱더 하지 않으시고, '그냥'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원로들이
한 말은 그들의 생각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고, 백인대장
자신이 자기가 한 일을 생색낸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우리
쪽에서도 예수님께 청할 때에는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냥' 간청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저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이런저런 일을 하겠습니다." 같은
약속을 할 필요가 없고, "저는
이런 사람이니...", 또는 "제가 이런저런 일을 했으니 저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같은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해서 받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청할 때에는 '믿음으로' 청해야 하고, 청한 다음에는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고,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감사드리면서 그것을 다시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이런 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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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창세 18,8)
예로부터 손님을 귀하게 대하라 하셨지요.
나에게 찾아오는 손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달라진다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세 사람의 길손을 하느님 대접하듯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시중들었습니다.
그 결과 불가능하게만 여기고 있던 사라가
늙으막에 아기를 갖는 엄청난 축복을 얻게 됩니다.
열병에 걸려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도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과 그 일행들에게 시중을 듭니다.
하느님의 방문을 받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시중을 들지 않을 수 없겠지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을
하느님처럼 대우하면
나는 하느님을 오늘 만난 것이고
그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무시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만난 것이 되지요.
그러니 오늘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오늘 하느님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6.27.|작성자 알타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