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29. 월[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마태 16,13-19)

2015. 6. 29. 오전 7: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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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9. 월[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마태 16,13-19)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으며, 또한 바오로를 부르시어 교회의 신앙을 널리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신앙을 물려받은 우리도 교회의 충실한 자녀로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교회를 건설하는 살아 있는 돌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힘차게 나아갑시다.

헤로데 대왕의 손자인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는 유다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기도한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전날 밤, 주님의 천사가 감옥에서 그를 밖으로 구해 낸다. (사도12,1-11)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내다본다.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고, 그는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그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 ( 티모테오 2서 4,6-8.17-18)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다.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맺고 푸는 권한을 주십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말씀을 교도권과 관련하여 교회 권위의 역할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유다교 랍비들에게서 맺고 푸는 것은 어떤 사람을 단죄하거나 사면하는 것, 무엇을 허락하거나 금지하는 교리적 또는 법률적인 결정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울타리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부 현대인들에게는 그리 취향에 맞지 않는 대목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보편적인데 왜 울타리를 쳐야 할까요? 그것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것을 믿고 고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올바른 신앙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때로는 교회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 또 때로는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들 자신도 스스로 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을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온갖 신앙의 혼용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맺고 푸는 권한은 신앙의 순수함과 단일성을 수호하기 위한 권한입니다.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의 신앙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가시적인 일치의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의 신자들로서, 어머니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나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모태신앙이었고,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신학을 7년 동안 배웠고, 사제생활 24년을 하고 있습니다. 공기가 늘 내 곁에 있기 때문에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물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지낸 것 같습니다 

어려서는 신앙생활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매일 기도하셨고, 주일미사 참례를 하셨고, 기일이 오면 가족들이 모여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시골에 가도, 모든 것의 중심은 미사였습니다. 문법을 몰라도 말을 배우는 것처럼, 신학을 몰라도 신앙은 자연스럽게 저의 몸에 옷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를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믿으셨고, 부모님이 제게 물려준 것이 신앙이기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가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저처럼 모태신앙인 신자들보다는 스스로 예비자 교리를 배워서 신앙인이 된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은 이성으로, 가슴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였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죄, 죽음,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분이시고,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도와주시고, 교회를 세우시어 우리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선택한 분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 할까요? 모태신앙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분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 할까요? 궁금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참된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은 완벽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꽃피울 냉철한 이성은 부족했습니다. 말은 하였지만 그것을 실천할 추진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죽을 때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박한 지식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냈고, 그의 편지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강한 추진력 때문에 때로 다른 사도들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오로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초대교회를 이끌어 갈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교우 분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자상하신데, 다른 신부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나요?’ 저는 자상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 사목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열정은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바리사이파처럼 주님을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우리도 사도들처럼>  송영진 모세 신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로 삼기 위해서 특별히 뽑으신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우리는 베드로 사도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베드로인가?" 답은 간단합니다. "그럴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베드로 사도의 실수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복음서 저자들이 그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또 그가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실수들은 오히려 그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것 같은 인물이 아니라...) 이 말은, 우리도 노력하면 베드로 사도처럼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은총과 보호가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하신 말씀,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저승의(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으면서도 배반자 유다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고, 곧바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저승의 세력이 더 이상 그를 건들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호와 베드로 사도 자신의 노력이 합해져서 그 자신도 살게 되었고, 전체 교회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예수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고,또 예수님의 은총만으로는 안 되고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기본 임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고, 그들이 그 일을 잘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따로 바오로를 사도로 뽑으셨을까? 왜 바오로 사도를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을까? 바오로 사도도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가 교회를 박해할 때 예수님께서는 왜 그를 내버려 두셨을까?

우리는 정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열두 사도가 일을 못하거나 안 해서 새로 사도를 뽑으신 것은 아니고, 열두 사도가 아닌 사도들이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를 사도로 뽑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바오로 사도를 제자로 부르시지 않은 것은 바오로 쪽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교회를 박해할 때 내버려 두셨다가 나중에 그를 부르신 것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어떤 섭리에 의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처음에는 열두 사도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교회가 점점 더 성장함으로써, 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감으로써, 바오로나 바르나바 같은 사도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두 사도를 본받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들은, 앞에서 이미 말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포함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 사랑, 충성심, 복음에 대한 열정, 헌신,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뜨거움'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미지근한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은 뜨겁든지 차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 아니라, 미지근한 것은(뜨겁지 않은 것은 모두) 차가운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미지근한 사람을 뱉어 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차가운 사람처럼 취급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때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미지근한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곧바로 회개하고 본래의 뜨거움을 회복했습니다. 박해자 시절의 바오로는 대단히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사도가 된 뒤에는 굉장히 뜨거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이 말은 교만도 아니고 생색내는 말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웠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사도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됩니다. 신앙인은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티모 4,17)

사도 바오로는
정말 열정적으로 복음선포를 하셨지요?
어떻게 그렇게 열심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주님께서 늘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셔서 가능했다고 하네요.

사실 우리가
이루어낸 크고 작은 일들은
그분이 함께 해 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또한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이 별 성과가 없다면
내 혼자서 이룰려고만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마음으로 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들과 함께 일 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두 기둥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늘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출처] 2015.06.29.|작성자 알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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