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단식 (마태 9,14-17)
창세기 25장에서 에사우는 불콩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팔았다. 이제 이사악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지자, 야곱은 맏아들이 받을 축복을 형 에사우에게서 가로챈다. 야곱에게 준 축복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미 그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창세27,1-5.15-29)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시대의 표상인 혼인 잔치의 비유로 응답하신다. 혼인 잔치에 신랑이 와 계시니 단식할 수 없다. ( 마태 9,14-17)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마태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 하느님은 계시지 않으며, 결국 그 하느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긴 논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만들었다면 좀 더 우리 마음에 들도록 만들었겠지요. 보십시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마음에 안 들잖아요.”라고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카인과 아벨 가운데 아벨을 선택하시고 야곱과 에사우 가운데 야곱을 선택하시는 하느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선택받지 않은 편에서 보면 억울하고 부당합니다. 더욱이 카인은 아벨의 형이었고 에사우는 야곱의 형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맏아들이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선택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일 뿐, 하느님의 선택은 아니지요. 컴퓨터로 채점하는 객관식 시험에서 시험 결과가 순전히 답안지를 작성한 사람에게 달려 있듯이, 인간 스스로 어떤 조건을 채우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결정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겠지요. 카인의 입장이 되어야 하고 에사우처럼 난감한 처지로 몰리게 되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음미하면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단식> 송영진 모세 신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마태 9,14),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단식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루카 24,41),
제자들이
바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예수님께 드린 것을 보면(루카 24,42), 그들이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배불리 먹으면서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슬픔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마치 단식을 하는 것처럼 지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손님들'은
'신랑의 친구들'(예수님의 제자들)인데, 지금
질문하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요한이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이용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혼인
잔치 손님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제자들이,
또 신앙인들이 '손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혼인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마태오복음
22장과 루카복음 14장에 있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신앙인들이
'손님들'로 표현되어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이고, 아버지의
집은 남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집이고, 그곳의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우리의 잔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나라 잔치에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참석합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 라는 적극적인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믿음과,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슬픔을 표현하는 단식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그래서
신랑을 빼앗길 일은 없는데, 그러나
신랑을 '잃는' 일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떠날 때 생기는 일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지키려고 해도 양이 목자를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목자의 입장에서는 양을 잃는 일이 되고, 양의
입장에서는 목자를 잃는 일이 됩니다.지금
우리가 하는 단식은 신랑을 빼앗겨서 슬퍼하는 단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신랑을 떠난 것을 회개하는 단식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했던 단식은 슬픔을 표현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안 믿었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메시아가
없는 슬픔을 나타내는 단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우리는 그런 단식을 할 이유가 없고,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떠났거나 한 눈을 팔았거나 딴 생각을 했을 때, 온
마음으로 예수님께 되돌아가기 위한 단식을 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일을 묵상하고,
동참하기 위해서도 단식을 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역시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단식을 해도, 수난 뒤에 부활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실상
부활에 참여하기 위한 단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방탕하게 살던 작은아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루카 15,16-17).
그가
단식을 하려고 굶은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배가 고프니까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정신을
차리려면 굶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기 때문에(날마다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루카 16,19).
그런데 단식을 했다면, 굶은 만큼 음식이(양식이) 남아야 합니다. 단식 때문에 절약하게 된 양식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단식에는 내가 덜 먹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단식을 아무리 자주 한다고 해도 그 일이 사랑과 나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단식을 하든지 배불리 먹든지 간에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살다보면
우리는 위아래를 따지고
사람된 도리를 따집니다.
그리고 그에 벗어나는 일에 대해선
분노와 열불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고요!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의 진짜 장자 에사오가 아니라
속임수의 달인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아니 어찌 그러실 수가 있지요?
때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인정받고
나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지금 더 부자가 되어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약은 사람이
더 성공하고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의 심오한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되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 여기고 축하해 줍시다.
나에게는 사실 그보다 더 큰 축복,
성령의 축복,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축복 등을
이미 베풀어주셨음에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시다.
오늘
다른 사람이 받는 축복을 축하해주고
내가 받은 축복에 감사하는 날 되시길 빕니다.
[출처] 2015.07.04.|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