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 9,18-26)
형 에사우의 보복을 피해 하란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 가던 야곱은 도중에 꿈을 꾼다.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그를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하시니,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베텔이라 부른다. (창세 28,10-22ㄱ)
회당장은 이미 죽은 자기 딸을 예수님께서 살아나게 하시리라고 믿었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마태 9,18-26)
시편 91(90),1-2.3-4ㄱㄴ.14-15ㄱㄴ(◎ 2ㄷ 참조)
◎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께 의지하나이다.
○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아래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안에 머무는 이,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 나의 하느님, 나 그분께 의지하네.” ◎
○ 그분은 사냥꾼의 덫에서, 끔찍한 역병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리니, 너는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
○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내 이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하늘의 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야곱은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납니다. 어머니 레베카는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만 외삼촌의 집에 가 있으라고 하지만, 그 분노는 언제 풀릴까요? 내일 독서에서는 이십 년이 지난 뒤에야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을 통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받았지만, 확실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축복은 고사하고 나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될까? 집에 돌아올 수는 있을까? 그렇게 길을 떠난 야곱이, 머물 곳도 없이 밖에서 돌을 베고 자다가 주님을 뵙습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쩌면, 다른 의지할 곳이나 의지할 것이 그에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딸을 살려낼 길이 없었고,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은 여자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덤덤하게 살아가던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그들은 주님을 찾아가 그분을 믿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희망이 모두 사라진 듯한 바로 그 순간에, 그래서 유일한 희망이신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순간에 기적을 체험합니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겪는 어려운 순간에,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다고 주위의 많은 분이 증언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다른 것에 의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기는 정말 힘들겠지요. 모든 인간적 기대가 무너지는 곳,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하느님의 집’,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하느님의 집’이 아닐까요?
<믿음과
구원> 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구원을
받겠지." 라는 여자의 말에서 '구원'은 병의 치유를 뜻합니다.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구원을
받았다." 라는 복음서 저자의 말에서 '구원'은 병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을 모두 뜻합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마자 즉시
병이 나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르 5,29; 루카 8,44). 지금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신 다음에 병이
나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세 복음서가 전하는 것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불치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원한 것은 병을 고치는 일이었고, 그래서
만일에 여자가 병을 고친 다음에 바로 떠나서 예수님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면, 여자는
몸이 건강해진 것에만 만족하면서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랬다면
여자는 영혼의 구원에서는 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몸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영혼의 구원도 받기를 바라셨습니다.)
'구원'은
주시는 예수님과 받는 사람 사이의 '일치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람 쪽에서 받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고,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달라고 요구해서 마치
빼앗듯이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마르 6,56)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의 옷만' 믿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여자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더 긴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자체가 바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페 2,8).
그런데
여자는 사람들 모르게 예수님의 옷을 만졌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여자의 치유와 구원을 공적으로 선언하시고 확인해
주신 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믿음이란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여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또는
지금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고, 동시에
병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나를 믿어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에는 "이제부터는 몸의 병을 고쳤다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나를 믿고, 마지막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여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자를 '구원'하신 일은 구원의 시작이고,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는 일은 이제부터 여자 자신이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선언하셨다고 해서 여자
쪽에서 더 이상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내용에서 '믿음'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이
말씀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 주님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죄인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산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것보다, 또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고 노력하면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 쪽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죄인 쪽에서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한 '죄인'이라는 말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된 의인이다."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만심에 빠지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나는 구제불능이다." 라고 스스로 포기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도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내가
나를 포기해도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최종적으로 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나는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창세 28,16)
여러분은
주님을 어디서 찾으십니까?
주님을 만나러 성당에 가고 교회에 가지요?
실제로 가서 주님을 뵙나요?
주님을 만나러
성지순례도 떠나지요?
거기서 주님을 만나뵙나요?
사실 성당 가서 주님을 만나기 어렵고
신부님을 만날 뿐이지요.
성지순례 가서 결국 알게 되는 것은
성지가 따로 없고
내가 사는 곳이 성지라는 것이지요.
주님을 만나러 찾아 다녀서는
그분이 그곳에 계신다는 보장이 없어
헛걸음질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니
내가 사는 곳 내가 가는 곳에 주님이 오시도록 하면
언제나 그분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내가 가는 곳에 함께 동무해 주시는데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오늘
내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
그분이 나와 함께하심을 한번 느껴보세요.
"아~ 그분이 여기 계셨네." ●
"괜히 딴 데서 찾아 헤매고 돌아다녔구먼."
이렇게 새롭게 깨닫는 날 되소서.
[출처] 2015.07.06.|작성자 알타반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치유가 필요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은
다시금 겸손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우리의 겸손은 간절함을 통해
주님을 뜨겁게 만나는 참된 기도가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모든 믿음이 시작되는 진실된 용기가 됩니다.
참된 용기는
믿음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우리의 열정입니다.
믿음은 용기로
더욱 단단해집니다.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용기로 드러납니다.
내어드리는 용기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힘껏 살 수 있게 됩니다.
지나간 모든 사건들에 또한 감사하게 되는 것은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모든 사건들에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치유를 향해 나아갈 확실한 길은
용기와 믿음의 길입니다.
용기와 믿음은 주님께 바쳐야 할 우리의 삶이며
치유와 구원을 위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본질은
우리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가장 큰 사랑의 기쁨입니다.
치유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