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아버지의 영 (마태 10,16-23)

2015. 7. 10. 오전 6: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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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아버지의 영 (마태 10,16-23)

해바리기 영글어 가는 가을이왔네

요셉의 형들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서 아버지 야곱을 이집트로 모셔 온다. 브에르 세바에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그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시고 그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시겠노라고 약속하신다. 야곱은 이집트에서 세상을 떠나지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사 두었던 땅인 막펠라 동굴에 묻힐 것이다. (창세46,1-7.28-30)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파견 설교가 이어진다. 제자들은 박해를 받겠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박해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그들 안에서 아버지의 영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마태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성령(聖靈)

<증언>    송영진 모세 신부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 이 말씀은, "박해는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된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박해를 받게 되면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아라."입니다. 여기서 '증언'이라는 말에는 박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뜻과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해자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잃은 양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또 박해는 자신의 신앙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박해가 없을 때, 즉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때에는 누구든지 믿는다는 고백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는 안 믿으면서도 겉으로만 믿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말하면 목숨을 잃는 박해 상황이 된다면, 말로만 믿는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바로 자기가 했던 말을 부정할 것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신앙인으로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해는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일이 됩니다.

박해는 자기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신앙생활을 했는지,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증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목숨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순교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목숨을 바치게 된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배교자가 될 것이고.)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8-20)." 이 말씀은, "증언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성령께서 대신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말씀이 성령께서 박해 자체를 막아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아니고, 죽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아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순교하게 되더라도) 신앙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또 신앙을 훌륭히 증언(증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증언할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말씀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로 가서 백성들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 라고 아룁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모세는 자기에게 말솜씨가 없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4,12)." 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많이 비슷합니다.)

예레미야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을 때, 예레미야는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라고 아룁니다. 예레미야도 모세처럼 자기에게 말솜씨가 없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8)." 라고 약속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편지로 써 보내는 말과 곁에 있으면서 하는 행동이 똑같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2코린 10,10-11)."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2코린 11,6)"

바오로 사도가 "편지로 써 보내는 '말'과 곁에 있으면서 하는 '행동'이 똑같다." 라고 표현한 점이 중요합니다. '행동'이라는 말을 '삶'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말'로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삶'으로 하는 설교였음을 나타냅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재주나 글재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는 일이고, '삶'으로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써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신앙을 증언(고백)할 수 없고, 신앙을 증언(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는 안 믿으면서 남에게 믿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말을 잘할 수도 있고, 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글을 잘 쓸 수도 있고, 잘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믿음'과 '신앙인다운 삶'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의 새 신자를 얻었습니다(사도 2,41). 그 설교는 성령께서 직접 하신 것은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베드로 사도 자신이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믿음을 이야기한 설교입니다. 그가 원래 그렇게 설교를 잘했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당시에 유대 최고의회 의원들이 그를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도 4,13)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보면... '성령의 도우심'에 사도 자신의 '믿음'과 '삶'이 합해지니까 그렇게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20)

내가 하는 말은
내 안에 있는 지식과 체험,
느낌과 감정 등이
어떤 대상 앞에서
조합되어 반응하는
내 인격의 단면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인간적 지식이
두서없이 엮어져
별 감흥 없이 나오는
육의 소리일 수도 있고
나의 기도와 사랑,
나의 믿음과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성령이 하시는 말이라면
내 안에 좋은 영과 기운,
좋은 생각과 감정이 머무르게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께서 말씀하실 것이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없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은
나의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성령의 말입니까?
설마 악령의 말은 아니겠지요?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을 통해
유익하고 힘과 용기를 주고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하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7.10.|작성자 알타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의 제자들을 능가하려고 그들보다 더 강한 이리가 되어 버린다면,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없고 오히려 그마저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주로 그들이 고발을 당하고 매를 맞으면서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고, 부모 형제를 포함하여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며 박해를 피해 다녀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무섭고 난폭한 이리가 되어 세상의 모든 적들을 물리치게 되리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증언을 포기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은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세상도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고 세상도 그에게 이리가 되어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견된 제자가 세상을 거슬러 증언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포악한 세상을 제압하는 훌륭한 언변이나 강한 힘으로 맞대응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가 너무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일까요?
에페소서에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6,12). 그래서 우리가 갖출 것은 하느님의 무기, 곧 진리와 의로움과 평화의 복음, 그리고 믿음입니다(에페 6,13-16 참조). 진리를 거스르고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면서 도전하는 세력에게 인간적인 무기들로, 우리의 능력만으로 맞서려는 유혹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리 떼 가운데 사는 슬기롭고 용감한 양들이어야 합니다! 
    


끝까지 견뎌라   반영억 신부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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