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목요일]내 멍에와 내 짐 (마태
11,28-30)
모세가 자기를 파견하시는 하느님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하고 신비로운 대답으로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신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어떤 이름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실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3,13-20)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이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멍에, 곧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시는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얽어매지 않는다. 그 가르침은 우리를 참다운 삶으로 인도한다.(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나는 있는 나다.”
하느님의 이름을 왜 알려고 하십니까? 이 말이 너무 도전적으로 들리신다면,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당에 주임 신부님이 새로 오시는데,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고 이름만 알고 있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느님께 이름을 묻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누가 자기를 보내셨는지 일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마치 관공서에서 질문에 대답하듯이 딱 부러지게 당신 이름을 밝혀 주지는 않으시고,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셨는데, 이 문장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여러 해석 가운데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직 모세도, 이스라엘 자손들도 하느님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지금 아무리 말로 설명해 주어도, 이름을 말해 주고 신학 이론을 펼쳐도 이스라엘은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은 이집트 탈출을 겪으면서 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탈출기 15장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느님의 대답은 모호합니다. “나는 나다.”라고 번역하든 “나는 있는 나다.”라고 번역하든,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아직도 체험하고 알아가야 할 분이십니다.
그러니 섣불리 하느님의 이름부터 물어서 알아보려고 하는 충동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무리 많은 말을 들어도, 그것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는지, 우리의 믿음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 작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지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는 천차만별입니다. 분명 십자가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 곁에 있겠지요. 주어진 십자가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자주 버거워하면서 낙담하기도 합니다. 이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안식을 주겠다.> 송영진 모세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은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메시아다." 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참된 평화를 뜻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되는 구원, 생명, 평화, 행복을 뜻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이라는 말은 이승에서의 인생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너희"
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이승에서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면서 걸어가는 괴로운 여행입니다. 권력자들도,
재산이 많은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고생하고...)
우리는
참된 안식도, 참 평화도, 참 행복도 권력으로는
얻을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이나 로마 황제들의 생애를 보면, 늘
암살당할까봐 두려워했고, 가족도
측근도 믿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평화와
안식이란 전혀 없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마태오복음서 저자가 한 말로 생각되는데, 어떻든 이 말은,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은, 구원과 생명과 안식과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은 해석할
때 많이 조심해야 할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거운 멍에와 짐을 벗기고 그
대신에 당신의 가벼운 멍에와 짐을 새로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바꿔 준다고 해도, 멍에는
그냥 멍에일 뿐이고, 짐은 그냥 짐일 뿐입니다. 그것이
'안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이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를 다시 번역하면, "내
멍에는 '편안함'이고, 내 짐은 '가벼움'이다."입니다. 뜻은,
"내가 편안함과 가벼움을 주겠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책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시는 분, 그래서
편안함과 가벼움만 주시는 분입니다. 그
편안함이 멍에일 수는 없고, 그 가벼움이 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해설할 때,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 다음에,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설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글자만 보고 오해한 것입니다.)
(무거운
족쇄와 차꼬에서 풀려나서 가벼운 수갑을 찬다고 해서 그것을
안식이라고 말할 수 있나? 교도소의
징벌방에서 풀려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감방으로 옮겨 간다고 해서 그것을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나?)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그 자체로 구원이고 안식이고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도소에서 석방된 사람이 감방에서 교도소 정문까지 걸어가는 일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고, 또 감방에서 읽었던 성경책을 들고 간다고 해서 그것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로
원하는 일,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멍에와 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이 무거운 멍에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그것이 바로 멍에와 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마태 16,24),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지고 가는 그 십자가는 멍에인가? 아닌가?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고, 내가 원하는 일이고, 그래서
기쁨으로, 또 사랑으로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영혼은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그러니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모든
순교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항상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명절을 맞아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이 멍에인가? 아닌가? 가족들에게 주려고 들고 가는 선물이 짐인가? 아닌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게 된다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한 여행이 될 것이고,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간다면 아무리 편안해도 지옥으로 가는 것 같은 괴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 (탈출 3,14)
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울 때
"있슴이 선이다."(ens est bonum!)이란
진술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다.
좋은 것, 멋진 것을 선으로만 생각했는데
있는 것이 선이라뇨!
하느님이 "선"이시라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선 자체"신 분이라면
있슴 자체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듯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 식물들은
살아있기에 선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다 선입니다.
살아있슴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계곡 낭떠러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나 야생화가
더 아름답고 귀하듯이
지금 삶의 조건이 취약한 가운데서도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아름답고 귀합니다.
있슴이 선이고
없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 있슴에 내가 있고
하느님 계시니 내가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의 조건이 픙요롭지 못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살아있슴을 경축합시다.
그리고 함께 있어주는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하고 축복합시다.
하느님,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셔서가 아니라 그냥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도 고백합시다.
뭘 잘 해 줘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줘서
함께 있어줘서
진짜 고맙다고...
[출처] 2015.07.16.|작성자 알타반
연중 15주간 목요일(마태11,28-30)
내 멍에는 편하다 반영억 신부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