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태12,1-8)

2015. 7. 17. 오전 6: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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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태12,1-8)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서 본 주님의 생명과 피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그 닮은 꼴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홉 가지 재앙을 겪고도 파라오가 고집을 꺾지 않으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맏아들을 죽게 하시는 마지막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신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인들의 집은 그 재앙을 겪지 않는다. 파스카 어린양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표지가 된다(탈출11,10─12,14)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율법의 규정을 어겼다고 다른 사람을 단죄할 것이 아니라, 계명이지만 우리 인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살아야 한다.(마태12,1-8)


마태오 복음 제 12장 1절 - 50절 ::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멍에는 유다교에서 가르침, 특히 하느님의 계명에 담겨 있는 가르침을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소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역할을 멍에가 하기 때문이지요. 현대적인 의미에서 말씀드린다면, 운전할 때의 차선이나 전철이 주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레일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고생스럽게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 예가 나옵니다. 안식일에는 추수를 하면 안 되는데, 밀밭을 지나가다 밀 이삭을 뜯어 먹는 행위가 추수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추수를 금하는 계명의 의미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지요. 이런 규정들이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이 이천 년 전 유다인들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금요일에 단식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목요일에 남은 음식을 모조리 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집 안에 어떠한 음식도 없었기 때문에 단식이라는 규정은 잘 지킬 수 있었는지 몰라도, 단식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멍에, 곧 예수님의 가르침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우리를 훈계합니다. 자동차가 차선을 벗어나거나 전철이 레일을 벗어나면 결코 제대로 달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편한 멍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일러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기쁘게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배가 고파서>  송영진 모세 신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마태 12,1-2).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노동'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배가 고파서'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심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정도였는지... 우리는 그런 세세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점 때문에 그들을 변호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면,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빵을 다윗이 먹었는데도 비난을 받지 않은 것은 그가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2,3-4).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바리사이들의 태도를 비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사정은 보지 않고 함부로 이웃을 단죄하는 태도를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또 배가 고프면 다 율법을 어겨도 된다는 가르침은 아니고, 율법이란 사람을 살리는 법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선 먼저 사람이 살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다가 몰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카베오기에 나옵니다. 그리스 군대가 일부러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공격했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기지 않으려고 전혀 대항하지 않고, 심지어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1마카 2,29-38). 그때 죽은 이들이 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때문에 몰살당한 사람들의 소식을 들은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은 안식일에도 전투를 하자고 결의합니다(1마카 2,40-41). (안식일을 지키다가 민족이 몰살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을 비난하는 유대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던 바리사이들도 마카베오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타티아스의 그의 벗들'의 결의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 중에 칼에 맞아 죽는 일과 배고픔이 같은 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같은 일이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칼에 맞아 죽든지 굶어죽든지 간에 죽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굶주림과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배고픈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면 안 됩니다.

전쟁 중에 사울 왕은, "오늘 저녁 내가 원수를 다 갚기 전에 음식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1사무 14,24)." 라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왕자 요나탄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숲 속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먹었습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사울이 요나탄을 죽이려고 했는데, 군사들이 모두 나서서 반대한 덕분에 요나탄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1사무 14,27-45).

왕의 맹세는 일종의 법이고, 사울 왕의 맹세는 특별법을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본보기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자기가 만든 법을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요나탄은 그 법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죄이고, 또 전투 중인 군사들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군사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은 '악법'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독재자들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더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흔히 독재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악법을 만들어 놓고서 "악법도 법이다." 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악법은 법이 아니다."입니다.)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면, 악법을 만들어 놓고서 사람들을 억압한 사울 왕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굶어 죽더라도 안식일 규정은 지켜야 한다."는 태도...과연 그것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일까?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바리사이들이 만든 악법입니다.)

이제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경우, 먹고살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로 편안하게, 기쁜 마음으로 성당에 다닐 수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겨우 하고 있는데, 평일 미사에 안 나온다고 꾸짖고, 단체나 모임에 가입하라고, 봉사 활동이나 행사에 참석하라고, 강요하듯이 말하고, 티브이 볼 시간도 없는데 성경 공부 안 한다고 잔소리하고, 먹고살기 힘든데 성전 신축 헌금이니 무슨 헌금이니 하면서 자꾸만 부담을 주고...물론 그런 일들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인데도 신심과 정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고... 마치 무슨 죄를 지은 죄인인 것처럼 바라보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유가 없고 쪼들리는 사람들은 점점 더 교회에서 멀어지고, 냉담하게 되고, 서럽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옛날에만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남의 사정은 헤아릴 줄 모르고,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



안식일의 주인(막 2:23-28) ^.^

<배가 고파서>(마태 12,1-8)  -故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의를 제기할만도 하다.  

왜냐하면 율법규정을 곧이 곧대로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온 바리사이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일(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은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분명하다. 이런 원칙을 세워 놓고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도 삶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준이 없을 때 혼동이 오고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혼동이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삶의 원칙을 정해 놓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고 정말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원칙은 어떤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인간이 법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즉 법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서 또는 인간을 법이라는 굴레에 메어 놓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공동선을 해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런 일은 법을 만들어 놓은 본래의 취지를 잘 못 알거나 공동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 잘못 이용될 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인간이 만든 법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해야 하고 올바른 해석이 뒤 따라야 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악법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이의를 들으시고 그들의 이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그래서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레위 24,8과 민수 28,8-9에 나오는 내용을 들어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인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로 바리사이들이 이의에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잘못은 인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본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무시하거나 죄없는 이들을 단죄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일어나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 1-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이 잘한 일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아니면 잘 못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 설명해주셨을 뿐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행동에 가장 큰 잘못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보다는 법을 우선시 하였다는 것이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사랑의 법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는 법은 없고 사실 사랑의 법보다 우선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단 한 가지의 법만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법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코전 13, 1-7)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 들을 수 있다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은 안식일에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라는 말은 단순히 밀 이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밀 이삭이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 미사 참례 때에 밀떡으로 만들어진 성체를 받아 보시듯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성체를 받아 모셨다는 것이다. 

 

한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성체를 받아보시지는 않고 다시 말해서 주일 미사참례는 하지 않으면서 미사 참례하는 다른 사람들을 잘못했다고 판단는 하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에 해야할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주님을 모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주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대해서 배가 고픈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먹어야 한다. 매일 먹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일만이라도 주님을 먹어야 한다.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표현은 성체성사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늘 주님에 대한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먹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은 제자들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주님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전혀 주님에 대한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데 어떻게 주일 미사를 기다릴 수 있으며 말씀을 일고 묵상할 수 있겠는가?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만이 아침 저녁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린 배를 채우고 목마름을 해갈시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마태 5, 5)리하고 진복팔단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목마름이 해갈 되지 않는다. 오늘 부터라도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나를 안식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또 나 자신이나 주위 환경도 아닌 바로 사람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의 샘] 안식일의 주인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12,2)

페이스북에
성당에 들어갈 때
민소매와 반바지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되는가 하는
그림이 올라왔더군요.

물론 덥다고
너무 야한 옷차림으로
미사를 본다는 것은
볼상 사납지 않느냐는 이야기겠지만
꼭 이런 글을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옷차림으로 오든
상관치 않으시고
온 자체로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 인간적인 관습에 따라
우리가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서도 싫어하시는 양
가르치려 한다면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지는 것과
무슨 다를 바가 있을까요?

하느님을 우리의 잣대로 판단하여
하느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맙시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를
이야기하고 나누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7.17.|작성자 알타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께서 주교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과 22년 전에 본당신부와 보좌신부로 함께 지냈습니다. 함께 산보를 다녔고, 주교님께서는 성당 마당에서 묵주기도를 자주하셨습니다. 수도자들을 존중해 주셨고, 함께 사목을 하셨습니다. 본당의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보고 겪은 일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년 전 교구청에 들어와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솔선수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막힘이 없고, 걱정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도가에서는 上善若水라고 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은 자신을 내주면서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고, 더러운 것을 정화시킵니다. 물은 다투지 않습니다. 산이 있으면 돌아가고, 바위가 있으면 나누어 가고, 웅덩이가 있으면 채우고 갑니다. 물은 겸손함을 보여 줍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금 교구에 좋으신 주교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교님께서 상선약수와 같은 사목을 하시리라 믿으며,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며칠 전에 형님이 하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말처럼 청년들에게 유익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강의를 하지만 형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2시간 일찍 출근해서 책을 읽었고, 1년에 300권을 읽었다고 합니다. 10년이 넘었으니 30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형님은 책속에서 답을 찾았고, 책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책속에서 인생의 후반전을 위한 양식을 구했다고 합니다. 저도 책을 가까이 하는 편이지만 형님만큼 읽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그날 형님은 인생을 효과적으로 살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의 길을 가는 과정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첫째는 변화라고 하였습니다. 다윈은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종은 바뀐 환경에 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강한 것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변화한 것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변화는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면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 마음의 채널을 하느님을 향해서 돌려놓은 것입니다.

둘째는 독서라고 하였습니다. 한권의 책은 대략 30년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100권의 책을 읽는다면 3000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변하는 사람은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는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하면 바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판과 같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강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강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강점을 알고, 그것을 키워가는 사람은 인생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강점을 안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은사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선교하는 은사, 들어 주는 은사가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알면 더욱 알차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는 습관입니다. 형님은 매일 2시간씩 책을 읽는 습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습관을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은 습관이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습관이 됩니다. 이것을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기도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목표입니다. 세상은 목표를 알고 가는 사람이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을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목표를 정한 졸업생이 목표가 없는 졸업생들보다 소득이 10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한 졸업생이 목표가 없는 졸업생들보다 소득이 100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가야할 곳을 알고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발걸음이 힘차고 가볍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나라입니다.

 

약속의 땅은 모세처럼 10가 기적을 일으켜야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은 꼭 좋은 가문에 태어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회개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내게 주어진 가능성을 나의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맡겨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미 하느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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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월요일>요나보다 더 큰 이(마태 12,38-42)15.07.20조회 393[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마태12,14-21)15.07.18조회 322[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태12,1-8)15.07.17조회 293[연중 제15주간 목요일]내 멍에와 내 짐 (마태 11,28-30)15.07.16조회 517[연중 제15주간 수요일]지혜롭다는 자들 (마태 11,25-27)15.07.15조회 309[연중 제15주간 화요일]'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마태 11,20-24)15.07.14조회 48[연중 제15주간 월요일] 평화, 칼 (마태 10,34-11,1)15.07.13조회 397<연중 제14주간 토요일>(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마태 10,24-33)15.07.11조회 333[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아버지의 영 (마태 10,16-23)15.07.10조회 312[연중 제14주간 목요일](2015. 7. 9. 목)(마태 10,7-15)15.07.09조회 203[연중 제14주간 수요일] 12사도 (마태 10,1-7)15.07.08조회 52[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목자 없는 양들처럼 (마태 9,32-38)15.07.07조회 65[연중 제14주간 월요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 9,18-26)15.07.06조회 121<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단식 (마태 9,14-17)15.07.04조회 98[7월 3일 금]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24-29)15.07.03조회 97[연중 제13주간 목요일]중풍병자치유 (마태 9,1-8)15.07.02조회 45[연중 제13주간 수요일]마귀들과 돼지 떼(마태 8,28-34)15.07.01조회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