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화요일]가라지의 비유 (마태13,36-43)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겨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다음, 모세는 하느님께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다시 당신 백성으로 삼아 주시기를 청한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자비하시며 너그러우신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탈출 33,7-11; 34,5ㄴ-9.28)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신다. 하늘 나라가 완성되는 마지막 때가 오기 전까지, 이 세상 안에는 하늘 나라의 씨앗과 악이 공존한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악이 사라질 것이다.(마태13,36-43)
시편 103(102),6-7.8-9.10-11.12-13(◎ 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주님은 정의를 펼치시고, 억눌린 이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네. 당신의 길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네.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
○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탈출기 32―34장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탈출기 19―24장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에 머물면서 하느님과 계약 관계를 맺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 곧 하느님께 속하여 그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32장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이 광경을 보고 모세는 계약의 돌 판을 깨뜨립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계약서를 찢고 계약을 파기하여 계약 관계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그냥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끌어안았듯이, 하느님 편에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 길밖에 없을까요? 이스라엘이 착하고 열심이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시라는 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야훼(주님)’라는 이름에 뒤이어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당신의 이 두 번째 이름은, 우리에게 좌절과 절망은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자녀가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는 자식과 맺은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는 현실이 바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을 때 그분께서 우리의 손을 놓아 버리신다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순간에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십니다(화답송 참조).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마태 13,37-39)."
이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를 설명하신 말씀인데,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마태 23,33)" 그런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도 사용했던 말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
지금까지
인용한 말씀들에 나오는, "악한
자, 원수, 악마, 뱀, 독사, 살인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 라는
말은 모두 '사탄'을 가리킵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도 않고 계속 죄를 짓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처음부터
사탄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그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맨 처음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첫 번째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사탄의 첫 번째 자녀로 변절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탄이 뿌린 것은 '유혹'이고, '가라지'는
그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입니다. 원래는
전부 다 '좋은 씨'였는데, 스스로 가라지로 바뀐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이 사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유혹한 책임은 사탄에게 있고, 그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게 되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죄 지은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0-42)."
이 말씀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은 일차적으로는 사탄과 그의 부하 마귀들이고, 넓은 뜻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유혹해서 죄 짓게 만드는 자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예고나 예언이 아니라 심판을
받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가라지'가
되었다고 해도 회개하면 다시 '밀'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밀'이어도 죄를 지으면 '가라지'가 됩니다.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마지막에 받게 될 심판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밀'로서 맞이하는가? '가라지'로서 맞이하는가? 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은 최후의
심판 때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인생을 마치는 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연옥에서
하는 일은 회개가 아니라 보속입니다.) 회개는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최후의 심판, 즉 공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죽은 다음에 바로 받게 되는 사심판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사심판 때문에 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병에 걸려서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는 사람은 그날을
대충 짐작하긴 하는데, 그래도 확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
일들이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는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고 말합니다(마태 13,30). 이
말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무한정' 기다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심판 때까지만'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뜻합니다. '울며' 라는 말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에 대한 '완전한 절망' 속에서 무기력하게 울기만 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은 심판관이신 예수님에 대한 '분노'와 벌을 받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뜻합니다. 이것은 벌을 받으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마태 13,36)
밀밭에는 가라지가 있고
보리밭에는 깜부기가 있고
나락에는 피가 공생합니다.
잔디밭에는 토끼풀이 자라고
야채밭에는 잡풀이 자랍니다.
그렇듯
세상에는 착한 사람만 있지 않고
악한 사람도 함께 있습니다.
밀밭을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가라지만 무성한 밭이 되고
잔디밭을 관리하지 않으면
풀밭이 되고
야채밭을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하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악이 너무 넘치지 않도록
선인들이 더 많이 나와야겠습니다.
점점 악인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같지만
여전히 선인들이 더 많기에
세상은 아직 살 만합니다.
여러분 안에 선이 악을 늘 물리치는
영이 늘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7.28.|작성자 알타반
인생의 끝에 서면 반영억라파엘 신부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오늘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