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2. 수]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요한 20,1-2.11-18)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아가의 여인은 밤새 사랑하는 이를 찾아 성읍을 돌아다닌다. 여인이 밤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이 여인은 사랑하는 이만을 찾는다. 그를 찾고 나면 놓지 않을 것이다. (아가3,1-4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막달레나의 모습은 아가의 여인을 닮았다. 막달레나는 주님의 시신이라도 자신이 모셔 가려고 애쓰면서 무덤에 머물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주님을 사랑한 막달레나는 부활의 증인이 된다. (요한20,1-2.11-18)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사랑> 송영진 모세 신부
복음 말씀이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제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사도들은 달아났거나 숨어 있는 상황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켰고, 무덤에 갔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찾으려고 노력했고, 자기가 직접 시신을 모셔 가려고 했습니다(요한 19,25; 20,1.15).
그것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일이었기 때문에당시 상황에서는 몹시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큰 사랑'을 실천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여자입니다(루카 8,2). 그 일을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라는 예수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곱 마귀' 라는 말을 어떤 '죄'를 뜻하는 말로 생각할 이유가 없고, '죄 많은 여자'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어떤 중병에 걸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렇게 '큰 사랑'을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만 특별히 편애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사랑을 적게 받아서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데, 우리 쪽에서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자신이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감사와 큰 사랑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자신이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하고 적게 사랑한다." 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사랑을 받는데도 받는 쪽의 마음가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도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래서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도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편애하신 일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먼저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먼저 받게 됩니다.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것을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알렸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바로 가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요한 20,1-10).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되돌아갔고, 마리아만 무덤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을 잘 모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려고 숙소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간 것인지, 아니면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는지 알아보려고 간 것인지...
어떻든 마리아가 무덤에 남은 것은 차마 그곳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것도 역시 마리아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울고 있었고,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요한 20,11-15). 따라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마리아의 '부활 신앙'에 응답하신 일이 아니라, '사랑'에 응답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났을 것입니다. 다만, 아직 '부활 신앙'을 갖기 전 단계였을 뿐입니다. (당시에 '부활 신앙'에 관해서는 모든 제자가 다 같은 수준에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마태 25,40).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그대로 이웃 사랑도 잘 실천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바라는 일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들을, 즉 예수님의 여러 가지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그 실천이 바로 '예수님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시키셨습니다(20,17).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즉시 사도들에게로 갔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요한 20,18).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던 모습보다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더 잘 드러냅니다.
연인이 곁에 있지 않기에 밤새도록 성읍을 돌아다니며 야경꾼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하고 묻는 여인은 분명 사랑에 눈먼 여인입니다. 아가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렇게 길을 돌아다니며 연인을 찾던 여인이 야경꾼들에게 매를 맞고 파수꾼들에게 겉옷을 빼앗기기도 합니다(5,7 참조). 창녀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인은 개의치 않습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막달레나 역시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안식일이 지나고 무덤에 찾아갈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한 20,9 참조). 이미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으니,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분이시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재하시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서 한번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물에 빠진 사람이 공기를 찾고, 목이 타는 사람이 물을 찾는 간절한 마음. 자식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 이것이 아직 어두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막달레나가 당신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간절히 찾은 그녀를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조재형 사제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들을 따뜻하게 대하셨고, 잘못한 여인들은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남성들에 대해서는 야단도 치시고, 그들의 교만과 질투, 허세를 지적하셨지만, 여성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자와 죄인들에 대해서 무척 관대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여성들을 만난 일들을 기억해 봅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고, 그 여인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이방인이면서 예수님께 병에 걸린 자신의 딸을 치유시켜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명한 탁자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주었습니다.
열 두해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부정한 행위를 했던 여인이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끌려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단죄하지 않았고, 먼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과부의 헌금도 칭찬하였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를 무척 사랑하셨으며, 두 자매의 오빠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 주기도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음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향유를 발라서 발을 씻겨 주었던 마리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골고타의 언덕을 오를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라오던 이스라엘 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을 합니다. 백조의 우아한 모습을 위해서 수면아래 백조의 발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명동거리는 늘 깨끗해 보입니다. 각종 쓰레기들을 치우시는 환경미화원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존의 그늘’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고도성장의 바탕에는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시골의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우리의 누님들은 버스 안내원을 하였고, 공단에서 미싱을 돌렸고, 쪽방에서 잠을 자야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더운 날씨에 경찰이 고가도로에서 차량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 복장만 아니면 아주 젊은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차문을 열고 시원한 물 한잔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원활한 차량 소통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경찰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작년에 있었던 교항님의 한국 방문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통역을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성체분배 안내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새벽에 나오셔서 자리 안내를 해 주셨습니다. 봉사자들이 없었다면 교황님의 방한 준비는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 주일 신자들을 위해서 점심을 마련했습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기까지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커다란 솥에 육수를 내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전날 장을 보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먹고 난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기쁜 마음으로 봉사해 주시던 자매님은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공존의 그늘에서 땀을 흘리시는 모든 분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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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여러분은
주님을 뵌 적이 있나요?
없다구요?
그럼 주님을 뵙기 위해 찾아 돌아 헤맨 적은 있나요?
그런 노력도 없었다면
그분을 만나뵙지 못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주님을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었는데도
그분을 못 만났다면
왜 그럴까요.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게 애타게
주님을 찾았는데
그분이 나타났는데도
처음엔 그분이 누구신지
못알아 보았지요.
그러니 우리에게도
그분이 나타나셨는데
우리가 못알아보았을 가능성이 높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때론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겠지요.
오늘 내가 만나게 될 사람중에
주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보물찾기 하듯이
한사람 한사람을 대해 봅시다.
분명 그 누군가의 모습으로
주님은 나에게 다가오실지도 모릅니다.
오늘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내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뵙는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7.22.|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