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토요일 ] 예언자시대끝 (마태14,1-12)
주간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 모든 일에서 쉬듯이, 7년마다 찾아오는 안식년에는 토지를 일 년 동안 쉬게 하는데, 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오십 년째 되는 해에는 희년 축제를 지낸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희년 정신에 따라, 땅은 본디 소유자에게 되돌려져야 하는데 땅의 본디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땅의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인일 뿐이다.(레위 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된다. 요한은 하찮은 이유로 죽임을 당하지만, 이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로써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던 예언자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마태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송영진 모세 신부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하다가 그것
때문에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14,3-12), 그
내용만 놓고 보면, 요한의
죽음을 헤로데와 헤로디아라는 개인의 죄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선포했고(마태 3,1-2),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를 특별히 더 엄하게 비판했습니다(마태 3,7).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요한의 비판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헤로데와 헤로디아만 요한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모두 요한을 미워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헤로데와
헤로디아라는 개인이 요한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이 요한을 죽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사사로운 살인죄가 아니라, 당시의
집권 세력에 의한 공적인 박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살인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헤로데가 했다는 말도(마태 14,2) 헤로데
개인의 말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불안감을 대변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였던가? 우리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것인가?" 라는 불안감.(이것은
양심의 가책은 아니고, 미신적인 불안감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자기가 한 일이 죄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미신적인
불안감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하고 불길한 불안감입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예언자들은 요한처럼
사람들의 죄를 꾸짖다가 요한처럼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그렇게 박해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죄를 꾸짖는 예언자적 활동을 하는 이들이 미움
받고 박해를 받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회개를 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죽여서라도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이 안 들린다고 해서 자기들의 죄가 덮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데 정말로 세례자 요한은, 또 예언자들은 꼭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죄를 꾸짖는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고, 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박해받고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예언자는 원래 그렇게 박해를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사람들의 살인죄가 당연하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박해자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이
회개하라고 꾸짖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가?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했다면, 요한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영혼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죽인 일은, 요한
쪽에서 보면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난 일이 되지만, 헤로데와
헤로디아 쪽에서 보면, 그들
자신들이 자기들의 영혼을 죽인 일이 됩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멸망하는 길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요한의
죽음에 동조한 기득권층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들이
미움 받고 박해받고 살해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운명이 아닙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죽이신 것과 같고, 살인자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언자들의
죽음이 당연한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십자가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은 다 당연히 죽도록 고생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부러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다보면 힘든 길을 만날 수도 있고, 죽을
고비를 만날 수도 있고,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편한 길을 만날 때도 있고, 죽을
위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체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주님을 충실하게 따름으로써 얻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몸이 많이 고달프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이 기쁨과 행복은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레위 25,10)
8월 첫날입니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사랑의 땀으로 시원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주일에 하루는 꼭 쉬어야 하고
7년마다 안식년을 갖고
7년이 7번 지나고
50년째는 희년을 선포하며
빚쟁이도 종살이도 없이 원래의 자유인으로
모든 백성이 살 수 있게 하였다지요.
오늘날 우리도
1주일에 한번이상 쉬는 날을 갖습니다.
안식년을 7년마다 갖는 사람은 거의 없고
특수직에 있는 소수만이 10년마다 안식년을 갖기는 합니다.
대통령이 특별한 경축일에 대사면을 베푸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희년과 비슷하지만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될 뿐입니다.
오늘과 내일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축제를 지냅니다.
모든 죄사함을 받기 위해 뙤약볕에 걷고 노숙하며
함께 참회하고 보속하며 고백성사와 성체조배 등을 합니다.
봉헌생활의 해를 맞이하여
모든 프란치스칸들이
이 해방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도록 땀흘려 준비하고
이제 전국에서 모일 1,800여명을 맞이합니다.
이 은총의 축제가
세상 모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데 작은 몫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2015.08.01.|작성자 알타반

체면이 뭐길래 반영억라파엘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유 재산권에 한계를 긋는 것이 희년에 관한 레위기의 법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땅을 구입하더라도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값을 지불하고 땅을 샀다 하더라도, 오십 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직전까지만 그 땅을 임대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땅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기 소유의 땅을 돈을 받고 완전히 팔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 땅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이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명합니다. 분명 이웃의 사유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땅은 다릅니다. 이집트 탈출을 체험한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땅은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꼭 필요한 마지노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지파, 가문, 가정이 살아가도록 주신 땅을 다른 사람이 영구히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주신 땅! 재력과 권력과 폭력을 동원하여 그 땅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웃의 생존을 위협하고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농경 사회가 아닌 오늘날에도 이웃의 삶을 위협하면서까지 나의 재산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모두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하고 배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