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열처녀의 비유 (마태 25,1-13)

(8. 28.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가운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권고하는데,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에게 배운 대로 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다.(테살전 4,1-8)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2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3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4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5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6 그리고 이러한 일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고 또 엄숙히 경고한 바와 같이, 주님은 이 모든 일에 보복하시는 분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시편 97(96),1과 2ㄴ.5-6.10.11-12(◎ 12ㄱ)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아, 악을 미워하여라. 그분은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목숨을 지키시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해 주신다. ◎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신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오는 신랑처럼, 주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한 때에 오실 것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으므로,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스승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표징은 어떤 것입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말씀이 마태오 복음 24―25장에 실려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초지일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 25,13 참조)입니다. 애매하고 참 답답하시죠!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오실 것이고, 오늘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처럼 갑자기 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니 그 날짜를 안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이비,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그 시간을 알고 있다면 날짜가 임박해 올 때에 준비도 할 수 있겠지만, 모르기 때문에 지금부터 늘 준비해야 합니다. 주인이 언제 찾아와도 성실하게 일하는 종처럼, 신랑이 언제 도착해도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는 신부처럼 지금 그렇게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해설서에서 어떤 이는 심판의 그 날은 바로 오늘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심판 날이 언제이든 그 심판의 결과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준비를 잘하는 것일까요? 그 모범 답안은 마태오 복음 25장 뒷부분에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이,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이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 그를 주님으로 맞이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등잔에 준비해서 넣어 두어야 할 기름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8월 28일의 복음 말씀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인데, 이 이야기는 종말과 재림에 관한 이야기이고,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종말과 재림을 준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처녀들이
기다리는 '신랑'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이고, 등불을
켜기 위한 '기름'은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열
처녀'가 모두 잠이 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과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을 생생하게
비교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마태 24,50)"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처녀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내세를
생각하면서 지금 준비하는 것은 '지혜'이고, 지금의
인생만 생각하면서 내세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달라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청을 거절한 것은, 신앙생활과
회개는 남이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야기의
내용만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이 자비도 없고 인정도 없는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준다고 해도 회개와
신앙생활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기름을 사러 갔던 처녀들이 돌아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청했을 때, 신랑이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면서 거절하는 모습도(마태 25,12) 자비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단히 차가운 모습으로 보이지만, 이
내용은 신랑의 무자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내용은 종말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게 되고, 그때에는
정상참작을 해 달라고 빌어도, 또는 지금이라도 회개하겠다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혹시
신랑이 너무 늦게 온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과 회개는 평소에, 즉
지금 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신랑이 언제 왔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때서야 기름을 사러 가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은,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서야
고해성사를 보려고 고해실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심판이
시작되면(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수도 없고 고해성사를 볼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심판을 받을 일만 있습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죽기 직전에) 회개를 해도 회개는 회개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처음부터 "나는
죽을 때가 되면 그때 회개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죽을
때'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 자체가 회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로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서 회개를 한다고 해도 '진정성
없는 회개, 형식적인 회개, 거짓 회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지금이라도
빨리 가서 기름을 사 와라. 안 그러면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갈 것이다.' 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아직은
괜찮다. 조금 뒤에 가도 된다.' 라고 말하면서 그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왔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에게 '주님,
저희가 빨리 가서 기름을 사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신랑은 '이미 늦었다.' 라고 말하면서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지금
곧' 그 날이 올 수도 있으니,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또
죽음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지금' 의식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항상
'죽음'만 생각하면서 죽은 사람처럼 지낼 수도 없고, 또
'지금' 회개한다고 해서 날마다 하루 종일 고해실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코헬 11,9)." 이
권고를, "인생을 기쁨 속에서 살아라. 단 하느님의 뜻 안에서." 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젊은이'는 사실상 '모든 사람'입니다.)
지금의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은, 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현세에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헛된 쾌락'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어제 오늘
연이어서 "깨어 있어라!" 하시네요.
어머니 모니카 성녀와
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 축일을 기해
마치 "다시 시작하라!"고 재촉하시는 듯합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살다보면
1년에 적게는 열 명에서
많게는 스무명까지도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정말 죽음에는 순서가 없더군요.
언제나 예상을 뒤엎고
생각지도 못했던 분이 먼저 돌아가시고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서도
몇년을 더 사시는 분들도 보게 됩니다.
친구 부모님들의 부고장을 받다가
어떤 때는 친구 본인상을 접할 때
나와 동년배나 어떤 때는 후배가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게 됨을 더 자주 보게되면서
정말 깨어서 잘 살아야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직 나이가 창창하다고 건강이 아주 좋다고
아직 내 때는 멀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최선을 다해 묵묵히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도 이를 의식하며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사는
멋진 날 되시길 빕니다.
[출처] 2015.08.28.|작성자 알타반
오늘 저녁에 우리가 나누면서 은혜받아야 할 이 열처녀의 비유는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이 그대로 배여 있는 비유입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데 신랑을 맞는 들러리들이 대개 "열 처녀"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최소한 열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회합을 모이거나 할례를 행하거나 유월절을 지키거나 결혼식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롯과 결혼할 때 "열 사람의 증인"(룻 4:2)을 거느렸습니다.
이와 같은 풍습을 잘 알고 있는 주님은 오늘 본문의 혼인잔치에도 열처녀를 신랑을 맞기 위한 사람들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 가운데 다섯은 슬기로운 처녀로 그리고 다른 다섯처녀는 미련스러운처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구분하셨을까요?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미련스러운 다섯처녀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두 집단, 두 종류의 처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
1.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두 종류의 처녀 모두 신랑을 맞는 일이 사명이었고 그리고 신랑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가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들은 신랑을 맞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격자들이었습니다. 선별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교인으로 따진다면 두 집단 모두 교인입니다. 믿음으로 따진다면 두 집단 모두 믿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음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다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로 따진다면 이 집단 모두 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 신랑이 더디옴으로 인해서 졸다가 잠들었습니다. 신랑은 오리라 기대했던 시간보다 늦어졌습니다. 아무리 신랑도 좋고 사명도 좋지만 졸리는 것을 이길 장사가 그리 않지 않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도 졸리는 눈꺼풀은 들어올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도 미련스러운 처녀도 다 졸며 잤습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이런 행사에 참여 하여서 가다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스러운 처녀 다 졸았고 그리고 결국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더디온 신랑이 도착하여 "신랑이 왔다"고 했을 때 일어난 것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함께 자고 함께 벌떡 일어났습니다.
3. 이들 모두 등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혼식이 저녁에 열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대의 문명이라는 것이 등불문명이었기 때문에 등불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로 차이점이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차이점 :1.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당장 필요한 등불만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외형적인 등불만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비된 기름그릇을 준비하고 그 그릇에 기름을 채워서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한 시간에 신랑이 도착하면 좋겠지만 옛날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준비해서 신랑을 맞으려 간 것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꼭 하라고 명하는 것도 안한 사람과 꼭 하라는 것만 하는 사람은 똑 같이 쓸모없는 존재다"라고 정의했습니다.
2. 미련스러운 다섯처녀는 기름준비는 하지 않고 등불만 가지고 갔더라는 것입니다. 미련스러운 다섯처녀는 당장 켤 등불은 가지고 갔지만 불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름기릇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 여기서 두 집단의 처녀들은 자격도 같았고, 실수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도 같았습니다. 문제는 미련스러운 다섯처녀는 기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빌리면 되지, 그때가서 대처하면 되지, 사면 되지, 극단적으로는 빼앗으면 되지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실수 하고도 신랑을 맞이하고 미련스러운 다섯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고 문 밖에서 울 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는 깨어 있는 것이 주요문제거리가 아닙니다. 주님도 깨어 있는다는 것은 한계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했다는 것이 슬기롭거나 미련스럽거나를 판단하는 판단의 근거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만 따지면 사실 늦게 온 신랑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제는 그런 것을 다루고자 함이 아닌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했느냐 하지 아니했느냐 입니다. 신랑이 더디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하는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등불이라는 외형만 갖추는 것으로는 결정적인 찬스에서 밀리게 되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기름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미리 미리 준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닥쳐서 하려다가 기회를 놓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1세기에는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합니다. 지금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진행형''이 중요합니다. 지금 재미없는 사람이 나중에 재미있기 힘들고, 오늘 창의성이 없으면서 내일의 창의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 고통의 길을 갈 수 있지만 그 고통의 길에서조차 재미와 창의성을 찾아내는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 진짜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내 과거를 보려면 지금 자신을 보면 됩니다. 그리고 내 미래를 보려면 지금의 자신을 보면 됩니다. 나중에 준비하리라 하지말고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지금 예비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일 슬기로운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슬기로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삶을 종말론적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그런 진리를 잘 말해주고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때가서 준비하리라 하면 늦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늘 나라의 특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며 가슴 설례이는 일인가! 처녀의 모든 생각과 마음은 온통 신랑을 맞는데 쏠려 있을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시간인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생활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아직 완성된 하늘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는 말에 유의하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의 자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나간다. 즉 어디에서 어디로 나간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항상 -에서 -로 옮겨간다. 일어남에서부터 다시 잠자리로, 한 주간에서 다른 한 주간으로,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항상 우리는 자리를 옮긴다.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여기에서 저기로,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인생이다. 매 순간 고정된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가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천차 만별일 것이다.
신앙인은 누구인가?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언제 어떤 자리로 옮겨가던지 그의 여정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항상 아버지께로 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신 예수님에게로 나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여정은 신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수도자의 삶이든 성직자의 삶이든 평신도의 삶이든 항상 우리의 신랑은 예수님이시다. 결혼생활도 아내와 남편의 만남이 마지막 종착점이 아니라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으러 가는 여정 중에 한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결혼생활이 되려면 부부가 함께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는 자세로 살아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부부는 서로 서로 영적인 참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수도자나 성직자도 마찬가지이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혼자 사는 생활에 머문다면 허전할 것이고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독신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성직자 수도자의 독신의 의미는 좀 더 적극적으로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마치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고 사랑스럽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그분을 맞으러 나가는 생활이 곧 영성생활이요, 신앙생활이다.
그럼, 신랑을 맞으러 나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요, 받아들인 그 말씀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슬기로운 처녀가 가지고 나간 기름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씀은 마음 속에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타오를 기름이 없으면 등불이 타오르지 않듯이 가슴은 있지만 타오를 기름인 말씀이 없는데 어떻게 말씀이 내 안에서 타오르겠는가? 어리석은 처녀들은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말씀을 생활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기름이 없는 등잔과 같다.
오늘 말씀은 또한 현재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은 현재일 뿐이다. 과거의 시간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나버린 시간이고 미래의 시간은 아직 내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다. 매순간이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께로 건너가는 시간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시간을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구원은 현재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신자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가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만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듯이 말씀을 듣지 않고 생활하지 않은 신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말씀을 듣지 않고 생활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신랑이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듯이 신랑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라고 하였을 때 "안 돼.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도록 하여라."고 하였듯이 기름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각자 자기가 받아들여 자기가 생활하는 기름이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씀은 모든 이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받아들이고 생활한 이만이 기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자기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의 등을 채워 줄 수 없다. 아무리 주유소에 기름이 많이 있어도 각자 자기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하듯이 등잔인 우리 자신에게 기름을 넣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등잔에 기름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가다가 꺼져 버리듯이 말씀을 우리가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기름을 넣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로 계속해서 갈 힘이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을 먹어야 한다. 이 말씀을 먹는 이만이 처녀가 신랑을 마중 나가러 가는 설레임과 기쁨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자기 등잔에 기름은 넣지 않고 등잔이 꺼져간다고 외쳐대기만 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유광수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