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손을 뻗어라.” (루카 6,6-11)
콜로새서는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께서 바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이심을 선포한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신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이다.(골로 1,24─2,3)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29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2,1 사실 여러분과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이들, 그리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디 정신에 따라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 인간의 목숨을 구하고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안식일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루가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유다교 묵시 문학에서 ‘신비’는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갖고 계시지만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인간 역사의 계획을 가리킵니다. 한편 헬레니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신비 종교에서는 ‘신비’가 그 종교에 입문한 이들에게만 전해지는 은밀한 가르침을 지칭하는데, 그 가르침을 전수받은 이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신비’는 이 두 가지 전통의 영향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감추어진 채로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래서 콜로새서는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데, 그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그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성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에 덧붙여 콜로새서는, 그 신비를 전하는 교회의 일꾼이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자신의 육신으로 채우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계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인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수고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넓은 전망 안에서 살펴볼 때, 아직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수고와 환난은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그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에게 계시는 되었지만 인간이 아직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신비의 특성이라면, 그 수고의 의미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분명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 근본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규정과 법규를 자기에게 편리하고 유리하게 마음대로 해석하려는 유혹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고집> 송영진 모세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7)." 여기서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고발하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고발하기
위한 증거와 증인을 찾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마귀를 쫓아내신 일과(루카 4,35),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은(루카 4,39) 안식일에 하신 일입니다. 또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시비를 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루카 6,1-5). 그런
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이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로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죽여야 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31,15)."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이
말씀은, "지금 내가 이 장애자를 고쳐 주는 것은 이
일이 안식일에 해야 하는 '좋은 일'이고, '목숨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면 너희가 나를 고발해도 좋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속마음을 아시면서도 일부러
장애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의도적으로 '도발(또는 도전)'을 하신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에 나오는 장애자는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즉 목숨이 위험한 응급 환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를 고쳐 주는 일을 안식일 다음날로 미루어도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를 고쳐 주신 것은 그
장애자 자신에게는 '급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고쳐
주시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안식일은 '무조건' 일을 하면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 2)
응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미루면 안 된다. 3)
남에게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남의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4)
남들이 보기에는 손의 장애가 목숨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목숨일 수도 있다. (손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노동자라면 손의 장애는 생존 문제와 직결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무엇이 '좋은 일'인지, 무엇이 '해치는 일'인지, 또
무엇이 '목숨을 구하는 일'인지, 무엇이 '죽이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박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말발'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 6,11)." 그들은
'말'로는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어서 '폭력'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 라는 말은 '어떻게 죽일까'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이 옳고 자기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자기들의
생각이 틀린 것 같아서 더 화가 나고... 그런 복잡한 심리 상태입니다.)
2)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데 그 방법을 찾지 못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증오심과
적대감이 너무 커지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잊어버리게 되고, 그러면서
거의 맹목적으로 분노를 터뜨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 유대인들은 그런 단계까지 간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연상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예수님의
생각을 물었을 때(요한 8,3-5),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8,7). 그때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떠났고, 결국
모두 다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요한 8,9).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과
분위기를 보면, 그들은 아마도 부끄러워하면서 떠났을 것입니다. 어떻든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말없이 떠난 것은 자기들에게도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없이 떠났다는 점은 같지만, 자기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커녕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을 의논하는 자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잘못된 생각을 할 수는 있는데,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즉시 고치고 바로잡으면 됩니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점점 더 큰 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지도자들 경우에, 그들의 고집은 그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데...지도자들은 왜 그것을 모르는 것인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여러분은 손에
문제가 없나요.
펴고 오그리는데 아무렇지도 않나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서 펴게 해 주시네요.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다면
일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구실도 어려웠겠지요.
예수님은 이렇듯 자상하시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 손이 성하다고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줄 모른다면
그게 바로 손이 오그라든 것이 아닐까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 "손을 뻗어라!" 하시네요.
오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나
만나게 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손을 뻗어라!"
내 손도 성해지고
그 사람도 행복해지니
이것이 참된 치유가 아닐까요?
[출처] 2015.09.07.|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