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금요일]새 포도주 (루카 5,33-39)

2015. 9. 4. 오전 6: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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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금요일]새 포도주 (루카 5,33-39)

새 술은 새 부대에

콜로새서 1장의 그리스도 찬가는 콜로새서의 신학적 특징을 드러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물고,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콜로 1,15-20)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믿음의 Q&A]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의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기다림의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종말의 메시아 시대에 속한 이들로서 살아간다. 그들은 혼인 잔치의 신랑과 함께 있으며, 옛 시대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루카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비유(11) 금식, 새 옷, 새 부대, 묵은 것, 그리고 찢어짐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콜로새 신자들 가운데서는 믿음의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축제일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 거기에 귀가 솔깃하고, 또 어떤 이들이 정령들이나 천사들을 숭배하는 것을 보면 저것도 해야 하지 않을까 동요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강조하면서, 천사든 정령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 해도 ‘충만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처럼 천상 존재들의 한 계층에 종속되어 계신 분이 아니며 그분 한 분만으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이처럼 창조로부터 구원과 만물의 화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세계와 직접 접촉하십니다. 볼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드님 예수님 안에서 볼 수 있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계시 헌장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절정이요 완성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우리 신자들의 환경이나 처지도 콜로새 신자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이단이 시작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단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성당 안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균형을 잃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적인 계시나 그릇된 신심 운동의 유혹의 손길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흔들리기까지 하는 나약한 우리입니다.
나의 믿음과 생활 안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한 분을 향하여 있고, 그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창조와 구원에서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한 분, 만물의 으뜸이시며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합니다!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2007/9/7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송영진 모세 신부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바리사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시비를 걸었고(루카 5,30), 그 다음에는 단식은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단식'은 '먹는 일'을 중단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즉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 때의 일회성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단식 투쟁을 한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회개를 위한 단식에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마귀가 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루카 7,33) 엄격하게 극기 고행을 하고 단식을 하는 생활을 한 것은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쳤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십 일 동안 단식기도를 하신 것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목숨을 걸고 하는 단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단식은 일상적인 신심 행위였고(루카 18,12), 형식적이었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위선적인 단식이었습니다(마태 6,16).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지금은 혼인 잔치 상황이고,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4-35)." 예수님께서 단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에(마태 6,17),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단식을 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단식을 안 해도 된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기쁨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일상적인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외적이고 특별한 때에는 단식을 하게 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입니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 수난에 동참하기 위한 단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있고, 그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빼앗길 일은 영원히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는 일은 자주 생깁니다. 믿음이 흔들리거나, 죄를 지었을 때...우리가 하는 단식은, 예수님을 떠나 있었던 우리가 예수님께 되돌아가기 위한 단식이고, 떠나 있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는 단식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다시 얻기 위한 단식입니다. (아무도 완벽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큰소리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떠나 있었던 적이 없고, 그러니 되돌아가기 위한 단식을 안 해도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에 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교의 관습과 전통을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것'과 '낡은 것'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옳지 않은 것은 버리고 옳은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된 것이어도 옳은 것은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새로운 것이라도 옳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식별하는 기준은 '하느님의 뜻(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류 구원이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지금 이 내용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데, 그 사랑은 언제나 항상 '새 포도주'와 같은 사랑입니다. 작은아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서 떠났다가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회개했고, '새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루카 15,12-21).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가리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루카 15,24). 이 말은, 작은아들이 낡은 삶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진짜로 새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큰아들은 자기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믿으면서, 그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낡은 사람'입니다(루카 15,25-32). 큰아들이 '새 포도주'를(아버지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새 부대로'(회개해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헌 부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포도주 같은 기쁨의 복음 (누가복음 5:33-39)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루카 5,34-35)

여러분은
단식을 가끔 하시나요?
별로 안 하신다구요?
복되십니다.
왜냐하면 늘 신랑이신 주님과
축제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가끔은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고
홀로 남겨질 때도 있겠지요.
그 때에는
그분과 함께 있었을 때의
아름답고 즐거웠던 회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좀 비울 필요가
있을 겁니다.

1년여 동안
열심히 일하고 살다보니
몸도 많이 불었고
마음도 온갖 잡다한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가을맞이로
절식을 시작했답니다.
똥배가 쬐끔씩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집착에서 벗어나
조금씩 맑아짐을 느끼니
그게 더 감사할 일입니다.

다시 주님과 더 깊은 친교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
오늘 작은 비움을 해보면 어떨까요?

[출처] 2015.09.04.|작성자 알타반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유 광수신부-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왜 사느냐? 라는 질문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인데 왜 사는가? 라는 뚱딴지 같은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런 질문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사랑하는 데 있고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이다. 즉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보완해주고 채워주는 것이고 그래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서로를 진실히 사랑한다면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관계이며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관계이다. 따라서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 상대이기 때문에 떨어질 래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시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나던 일을 말하면  네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탯줄을 잘라 줄 사람도 없었고 목욕시켜 줄 사람도 없었으며 소금으로 문질러 줄 사람도 없었고 포대기에 싸 줄 사람도 없었다. 너를 애처롭게 보아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 떨어지던 날, 너는 들에 내버린 개구멍받이 신세였다. 내가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이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젖가슴이 부풀고 거웃도 자랐는데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 나이가 된 것을 보고 내 겉옷 자락을 펴서 너의 맨 몸을 감싸주었다. 나는 맹세하고 너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너를 목욕시키고 너에게 묻은 피를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수놓은 옷을 입혀 주고 고래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겨 주고 아마포 띠를 띠어 주었으며 비단 겉옷을 입혀 주었다. ”(에제 16,4-10)


하느님은 인간의 한쪽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의 한쪽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늘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이고 행복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창조되었다. 즉 인간은 하느님한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한테 사랑받을 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존귀함이며 동물과 다른 점이다.

즉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한테 사랑받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을 신랑으로 삼은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이고 인간의  품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하고 그것이 곧 행복이고 생명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신랑이신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신명 30, 19-20)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하느님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면 인간이 되고 돈을 사랑하면 되고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이 되고 쾌락을 사랑하면 쾌락의 노예가 된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닮아 가고 하느님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다.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고 이루워 질 수 없었던 모습이 이루워진 것이다. 그래서 죄인과 하느님이 함께 하는 성찬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이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실현시켜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제는 헌옷을 입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새 옷을 입어야할 때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할 때이다.


새 천조각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로 구멍을 채우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충만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 천조각은 비록  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천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충만함이다.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생명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코후6, 17)


복음을 듣는 자세가 있다. 즉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새 천 조각이란 복음이고 헌 옷이란 자기의 고정관념, 생각, 자기의 삶의 틀, 선입관 등이다. 복음을 들었으면 자기의 고정 관념에 얽매여 있지 말고 복음의 생각으로 바뀌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복음 묵상할 때보면 복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생활에 맞게 말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복음 묵상이 아니라 일종의 생활 나눔일 뿐이다. 복음 묵상을 했으면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한다. 복음 묵상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 따라서 자기의 생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나날이 새롭게 변화되고 복음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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