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루카 11,5-13)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갚음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오히려 번성하여 의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심판 날에는 악인들이 사라지고 의인들이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말라키 3,13-20ㄴ)
13 너희는 나에게 무엄한 말을 하였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런데도 너희는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14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15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16 그때에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서로 말하였다. 주님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 17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나서는 날에 그들은 나의 소유가 되리라.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 18 그러면 너희는 다시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 수 있으리라. 19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다. 꾸준히 청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지 않으신다.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루카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누군가 부탁을 해 올 때, 저는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여 대답한 다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번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는 말이 좀 생경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열 번 찍으면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번 부탁은 거절하지만, 자꾸 조르게 되면 결국은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열 번 찍으면 나무가 넘어가나요?” 대답은 간단했지요. 아무나 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갈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나무를 알아보고 골라서 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무들은 처음에는 넘어갈 것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꾸 매달리면 결국은 넘어가게 되어 있는 나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하느님의 모습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듯이,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아시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하게 열심히 간청하였지만, 그 결과가 우리의 청원과 전혀 다를 수가 있음을 종종 체험합니다. 설령 우리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싫어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려고 잠시 유예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도>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줄곧 졸라 대면 달라는 대로 다 주실 것이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주신다." 라는 뜻인데, 당신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줄곧 졸라 대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안 주시려고 하셨다가도 우리가 끈질기게 졸라대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할 때에는 '간절함'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대충 몇 번 기도하다가 그만둘 것입니다.
또 '인내'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려고 하는데도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설 것입니다.
간절함에서 정성이 나오고, 정성은 인내로 이어집니다.
"주시면 좋고, 안 주시면 할 수 없고..." 같은 태도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 쏟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눈으로는 TV 화면을 바라보고 입술로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을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기도만 해야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할 때에는 미사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정성'은 원래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언제' 들어 주실 것인지는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러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잘 기다리려면 꼭 필요한 것이 인내심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갈망했던 조선 시대 순교자들의 기도가 이루어진 때는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고, 그 세월 동안 많은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다시 한 가지 질문을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그냥 믿고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기도'란, 안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을 설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성을 다 쏟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 아버지께서 이미 열어 주신 문을 열고 들어가라."가 됩니다.
좋은 예가 영성체입니다.
사제가 성합을 들고 제단 아래로 내려가면, 신자들은 그 앞으로 가서 성체를 받아서 먹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는' 상황입니다.
영성체를 하지 않을 사람은 그냥 자리에 앉아 있을 텐데...사제는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가서 억지로 성체를 먹이지는 않습니다.
고해성사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제는 고해실 안에 앉아서 고해성사를 볼 사람을 기다립니다. 고해실 문은 닫혀 있지만, 잠겨 있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제는 고해성사를 보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고해실로 끌고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 나는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면, 자유 기도를 못한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외우고 있는 기도문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문은 거의 다 기도서에 있으니 자유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면 기도서에 있는 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정성을 다해서 기도서에 있는 기도문을 읽는 것도 좋은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문을 다 암기할 수도 없고, 암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꼭 자유 기도를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 기도를 잘하면 좋긴 하지만, '빈말'만 늘어놓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자기 입으로 "나는 기도를 잘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다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은 기도를 정말 잘한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를 보면, 사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과 기도를 잘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또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기도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이나 기술 같은 것이 있을까?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라고 말하는데, '기도의 기술'은 세속에서 말하는 '대화의 기술'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의 비결(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뿐입니다.
충실한 신앙생활.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13)
여러분은 자녀에게 많은 것을 주셨지요?
생명을 주었고, 애정을 주었고
돈을 주었고, 신앙을 주었고 삶의 지혜도 주었을 겁니다.
그들이 청해서 준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들이 청하기도 전에 주고 싶어서 다 해 주었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뭐든지 좋다는 것은 다 주고싶어 하지요.
때론 가난해서
더 많은 재산을 못 물려주어서
때론 허약하고 건강치 못한 몸을 물려주어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들이
무엇을 청할 때 가장 기쁘고
무엇을 청할 때 제일 슬프나요?
자녀가 부모에게 인생의 지혜를 청할 때 가장 기쁘고
없는 돈을 자꾸만 내놓아라 할 때 가장 슬프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사실 청하기도 전에 주시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싶어 하시는 것은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성령이시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주님께 뭘 청하시고 싶나요?
성령을 주십사 청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며
성령의 열매와 선물들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겁니다.
돈이 중요합니까?
명예가 중요합니까?
아무리 돈과 명예를 얻는다해도
성령의 선물인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절제, 인내, 친절, 선행, 진실같은
성령의 열매만 하겠습니까?
주님, 저에게 성령을 보내주소서. 아멘.
식탁에서 기도하는 노인
기도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떤 이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좀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고달프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좀 좋은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십사는 것이었다. 그는 기도를 바치고 또 바쳤다.
여러 달이 지나고 해가 흘렀다. 참다못한 그는 마침내 좌절과 절망 속에 고함을 질렀다. “하느님, 제발 저 좀 봐주십시오!” 그러자 그분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나 좀 봐주라. 제발 복권 좀 사거라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누군가가 부탁을 해 올 때, 어떤 이는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여 대답한 다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번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이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열 번 찍으면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한 번 부탁은 거절하지만, 자꾸 조르게 되면 결국은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그이에게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열 번 찍으면 나무가 다 넘어가는 모양이지요?” 대답은 간단했단다. “아무나 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갈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나무를 알아보고 골라서 조르니까요.” 그런 나무들은 처음에는 넘어갈 것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넘어가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자꾸 매달리면 결국은 넘어가게 되어 있는 나무들이라는 거다.
하느님의 모습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듯이,선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늘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아시면 우리에게 그것을 반드시 주시리라. 그러나 꾸준하게 열심히 간청하였지만, 그 결과가 우리의 청원과 전혀 다를 수가 있음을 종종 체험도 할 게다.
설령 우리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싫어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좀 더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려고 잠시 유예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으리라.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는 성찰과 반성, 새로운 깨달음이 늘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조건적으로 절대자를 향해 청하면서 의지하는 ‘원초적 종교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늘 상 잊어서는 안 될게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이렇게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그러나 그 기도 지향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면, 그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이루어질 수도. 기도는 상호간의 대화이니까. 대화는 훈시나 강연이 아닌 쌍방이 주고받는 의견 교환인 말로 이후어지는 수단이다. 그러니 주고받다 보면 서로가 이해되고, 그러면 서로 소통이 되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 사회는 소통이 제대로 잘 안된단다. 그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게다.
이런 이해의 어려움으로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건 그만큼 그 대화는 못했다는 거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를 하라신다. 그만큼 당신 백성과 항구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시는 우리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당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슨 방법으로 주님 은총을 구할 수 있을까?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자꾸만 두드리면 그 문은 반드시 열릴 것이고 또 그 무엇을 주시리라.
사실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면’ 그분 사랑 때문에 결국은 이루어질 게 빤하다. 그렇지만 때로는 우리 자신의 죄의식에서 그 하느님을 감히 볼 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분 앞에서만큼은 감히 뻔뻔스러울 수는 없기에. 하지만 지나친 위축도 결코 바른 자세는 아닐 게다. 매사 줏대도 없이 벌벌 떠는 이를 어디 좋아할 이가?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죄는 언제나 지을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열릴 듯 닫힌 그 문을 반드시 연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면 결국은 열리게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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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
고려 시대에 이조년 선생님께서는 아름다운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름 하여 ‘다정가’입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누군가 이렇게 풀이하였습니다.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난 밤 삼경에 소쩍새는 접동접동 구슬피 밤을 울어 예도 나뭇가지에 맺히는 봄소식을 알 리 없고 이 내 몸은 다정도 병이어서 잠 못 들어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니, 어쩌면 우리들 때문에 더욱 잠 못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은 겉모습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배우지 않아도 ‘양심’이 이끄는 데로 살아갑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겸손할 줄 압니다.
원망, 분노, 욕심, 시기, 질투, 폭력, 전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고, 거짓된 자아를 따라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기도는 내면에 있는 참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내면을 사랑하면 비로소 보일 것입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수달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