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책임져야할 것 (루카 11,47-54)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그녀는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며 살았다. 데레사 수녀는 수도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으나 오로지 주님께 매달리며 곤경을 이겨 나갔다. 『자서전』, 『완덕의 길』 등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그녀는 15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데레사 수녀를 시성하였고,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아빌라의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열렬한 바리사이로서 흠 없이 율법을 준수하려고 노력했던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한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므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서3,21-30ㄱ)
형제 여러분, 21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130(129),1-2.3-4.5(◎ 7ㄴㄷ)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계속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신다. 예언자들을 박해한 조상들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분을 옭아맬 구실을 찾는다.(루카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어떻게 예상하셨을까요? 신학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거부와 박해를 받았다는 점을 예수님께서 잘 아셨기에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셨으리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을 죽인 과거 세대의 후손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조상들이 살해한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조상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예언자들이 옳았음을 드러내는 행위이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지 않고, 그들을 존경하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은 물론 다른 이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들도 조상들과 똑같이 예언자를 죽이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입증합니다.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이렇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 세대가 박해하고 있는 예언자들은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아니, 다음 내용을 자문해 보셔도 충분합니다. “나에게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진리 편에서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부르짖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톨릭 사회 교리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태어나시더라도, 거부와 박해를 당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비극인 것 같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유대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원래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예언자들을 공경하고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 자체는 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다면,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공경하고
기리는 것은
진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척'이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범죄를 감추기 위한 또 다른
범죄가(위선이라는 죄가) 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을 죽였고, 사도들도 죽였습니다.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다를 것이 없는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상들과 자기들은
다르다는 그들의 말은(마태 23,30)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47-51)."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조상들의 죄를 후손들에게 물으시겠다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언젠가는 반드시 죄인들의 죄를 물으실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 라는 말은, 어떤 특정 세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라는 말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을 죽인
죄를 카인에게 바로 물으셨고,
곧바로 벌을 내리셨습니다(창세 4,9-16).
그러나 그 뒤로는
예언자를 박해하거나 죽인 죄를
'즉시' 물으시거나 처벌하신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벌이 내리더라도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내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카인의 경우에도 사형선고를
내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에게 회개하고 보속할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즉시 처벌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것을
'면죄부'를 주신 것으로
착각하거나,
하느님께서 모르시거나 잊어버리신 것이라고 오해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오판하거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장 천벌이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잊어버리신 것도 아니고,
죄를 그냥 덮어버리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처벌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용서와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이 믿음이 자만심으로 변질되면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겠지." 라는 생각은 옳은
생각이 아니고,
아주 오만한 생각입니다.
용서받는 것은 우리 쪽의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 쪽의 의무가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심판과 처벌을 내리시지 않는 하느님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지금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왜 심판하시지 않는지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은데,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완전한 정의가 실현될 때가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1) 하느님께서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그 죄인은
꼭 '저 사람'만은 아니고, '나'도 해당된다는 것.
다른
사람의 회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2) 하느님께서 기다려
주시던 것을 멈추고,
"이제는 심판을 해야겠다." 라고 결정하실 때가 언제인지 모르는데,
그날과 그 시간이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일
수도 있다는 것.
3)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나는 자녀인데,
설마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시겠어?"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1)
우리나라만큼 학구열이 높은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석박사가 넘쳐납니다.
요즘은 고졸이 아니라 대졸도 명함을 못 내밀고
적어도 대학원은 나와야 하고 유학이라도 갔다와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직장 잡기가 힘들다 하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온 국민이 지식을 쌓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국민과 국가와 사회의 수준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지식층들이 망쳐놓고 말아먹고 있습니다.
지식층들의 회개 없이는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지식인층들인 바리사이들을 혼내시네요.
배운 것들이 그것을 공공의 유익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데만 쓰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공부를 많이 하셨습니까?
공부를 많이 하고 학위와 자격증을 취득한 것을 자랑으로 삼기보다는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오히려 나보다 기회와 여건이 안 되어 공부를 많이 못했지만
그들의 작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소박한 이웃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내가 배워 알고있는 것만 잘 나누어도
세상은 한결 아름다워질 겁니다.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나의 작은 지식을 나누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라파엘 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냐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시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가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데레사 성녀가 걸었던 완덕의 삶을 본받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시기를 기도합니다.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21살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철저한 고행과 관상으로 참된 수도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동료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관상 수도회를 지켜나갔습니다. 1582년 알바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1622년 시성 되셨습니다.
데레사 성녀께서 수녀들에게 타이르는 말씀을 하셨는데 함께 묵상함으로써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기름진 땅이라도 아니 가꾸면 가시와 엉겅퀴가 날 따름이니 사람의 정신도 이와 같으니라. 영성적인 일들을 항상 좋게 말할지니 이를 테면, 수도자 사제, 은수자니라.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매양 말을 적게 하라. 하는 일, 대하는 일마다 조심성을 가져라. 언제나, 특히 하찮은 일에 마구 우기지 마라. 누구에게나 알맞은 기쁨으로써 말하라. 어떤 일에든지 조롱을 하지 말라. 신중과 겸손과 스스로 부끄럼 없이 남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서 기꺼워하는 이와 기꺼워하고 슬퍼하는 이와 슬퍼할지니 결국 모든 이를 얻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변명을 하지 마라.”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2)
율법 교사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번째 저주가 선언되고 있다.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이유는 그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사람들 앞에서 치워 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지식'이라고 번역된 '그노세오스'(gnoseos; knowledge)는
'알다'를 뜻하는 동사의 원형 '기노스코'(ginosko)에서 유래하였다.
'소피아'(sophia)가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지식'
(gnoseos)은 진리에 대한 직관적 앎과 인지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아는 지식'(2코린2,14; 10,5)을 의미할 경우에는
관용구처럼 쓰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교사들은 하느님 율법의 수호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나름대로의 해석 방법으로 구약에 나타난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오히려 애매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열쇠'는 보통 '주권'과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데, 여기서는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열쇠'('클레이다'; kleida; key)라고 표현하고 있다.
율법 교사들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계시인 구약 가운데서
그 중심적인 정신은 다 없애버리고 형식만을 남겼다.
그리고는 스스로 복잡하고 무겁게 만든 이 규정을 인위적 권위로서
사람들에게 가르친 그들의 잘못이 바로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종들'을 상징하는 예언자들을 죽이는 것도
악한 것이지만, 더 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차단시켜버리는 행위라는 것이 여기서 밝혀진다.
실상 율법 교사들은 하느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교사들은 마치 '천국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사명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율법에서 정신은 죽여버리고 형식만 남겨둔 그들의 행위나,
인간적인 전통에 맹목적으로 순종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부과하는 그들의 행위는, '진리의 문','천국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조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던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