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루카 11,42-46)
바오로 사도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사람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구원 없이는 아무도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로마 2,1-11)
1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62(61),2-3.6-7.9(◎ 13ㄴㄷ 참조)
◎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구원이 오리니, 내 영혼 그분을 고요히 기다리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
○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 내 영혼아, 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
○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불행하다고 선언하신다. 그들이 율법의 아주 작은 계명들도 준수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의로운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들 마음에는 정의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루카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에는 미사에 참례해야 하고, 주일 미사에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강조하다 보니, 적지 않은 신자들이 종교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살다가 주일 미사에 빠지게 되면 고해소에 가서 이 내용만 가지고 성사를 보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으면 판공성사 때까지 내내 성사를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면 달리 고백할 죄가 없고, 주일 미사 빠지는 것이 내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인 듯이 …….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칠하여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그들의 죄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언급하는 “남을 심판하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어떤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겉과 속을 만드신 분, 곧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잔과 접시에 담긴 음식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훈계하십니다. 신앙과 수계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삶이 그것을 뒤따르지 않는다면 바리사이적인 형식적 종교 생활에 불과할 것입니다.
겉과 안이 일치하는 삶, 정직하고 진솔한 삶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소수의 정직한 사람이 다수의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살려낼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송영진 모세 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십일조를 내는 일은
'겉으로' 잘 보이는 일이고,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 실천은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겉으로 보이는 일만(생색내기 좋은 일만) 잘하고,안 보이는 일은 안 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라는
가르침과 뜻이 같습니다. 하느님께 뭔가를 바치려면 하느님께서 받기를 바라시는 것을 바쳐야 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의로움'은 '이웃 사랑'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라는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물론 십일조를 내는 일도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원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는 헌금이기 때문에, 십일조도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너희는 세 해마다 끝에, 그해에 난 소출의 십분의 일을 모두 가져다가 너희 성안에 저장해 두어라.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8-29)."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의 명령 속에 들어 있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 라는 말씀만 생각하고, 그 앞에 있는 말씀은, 즉 십일조 헌금으로 해야 하는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바리사이들을 비롯해서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내는 일을 잘하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은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받을 복만 생각하면서 십일조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적을 변질시킨 것이고, 하느님의 명령을 왜곡한 것입니다.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를 내는 일도 잘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십일조의 원래 목적이 '사랑'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사랑'이 목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당시에 십일조를 받는 쪽,
즉 사제들 쪽에서도 십일조의 원래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낸 십일조 헌금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하면서, 그 돈을 다른 용도에 사용한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가져갔거나...
예수님께서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했다고 꾸짖으신 것은(루카 19,46),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에
대해서만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 운영 전반에 대해서, 또 사제들이 헌금을 거두는 일과 그 헌금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도 꾸짖으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또는 헌금을 안 내도 되는가? (하느님께 바치는 일을 안 해도 되는가?) 그냥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기만 해도 되는가?
이 질문에서 바로 연상되는
내용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을 때 어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루카 21,3-4).
예수님의 칭찬은, 헌금을 안 내도 되는데 냈다는 칭찬이 아닙니다. 그
과부가 복을 받기 위해서, 또는 생색을 내기 위해서 헌금을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 실천'을 하기 위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헌금을 냈다는 칭찬입니다. (헌금을 낸 것 자체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사랑을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일은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단, 각자 자기 형편대로.
또 '사랑'도 각자 자기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서 누구나 예외 없이 최선을 다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은 부자였을까? 비유의 내용을 보면, 그가 부자였는지 아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고,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 실천을 '돈으로'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은 가난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신명기의 십일조 규정에서 레위인을 가난한 사람들 속에 포함시킨 것은 레위인들이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레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간 것은 가난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고, 그의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부유했든지 가난했든지 간에 명색이 성직자들이고, 모범적으로 사랑 실천을 해야 할 사람들인데, 사랑 실천을 하기는커녕 외면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성직 수행은 '위선'입니다.
(사랑은 돈이 없어도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재산이 많다면 그 재산으로 사랑 실천을 더 많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재산이 많을수록 더 인색해지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로마 2,10)
내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면죄부일 수는 없으며
구원의 티켓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비구원의 상태에 있고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라고 구원의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비종교인보다 오히려 더 선인이 되어야하고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선을 행하는 사람이면 구원을 얻게 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면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비신앙인보다 더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비신앙인보다 구원이 더 멀어집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선을 베푸는 것이
공정한 하느님의 셈법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입니까?
종교인입니까?
그렇다면 더 선업을 쌓고 악을 더 멀리하십시오.
그만큼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중성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게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두려움이 각인된단다.
아기의 무의식 속에 자신이 내쳐질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이게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 한다.
그래서 본디의 자기 모습이 아닌 게 무의식적인 자기로 각인이 되어
점점 자신의 진정성을 잃어 가는 가 보다.
가끔씩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한다.
믿음의 길을 쉽게 가는 방법은 없겠냐는 거다.
성당에 안 가자니 그렇고, 가자니 재미없단다. 기쁨이어야 할 믿음이 멍에가 된단다.
대부분의 경우 끌려가는 신앙이기에 그렇다. 물질의 십일조 못지않게 사랑의 십일조도 중요하다. 그러니 하루 중의 몇 시간은 떼어 놓자.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 시간으로 남기자.
꼭 가야 할 곳이라면 미사 후로 하자. 시간의 십일조도 중요하니까.
이런 ‘앞서 가는 믿음’으로 바꾸면 어떨까?
“불행하여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윗자리와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을 지워 놓고,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46 요약)
주일 미사에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면 고해성사 감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이 점을 강조하니, 적지 않은 신자들이 종교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살다가
주일 미사에 빠지게 되면 고해소에 가서 이 내용만 덜렁 들춘다.
또한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으면 판공성사 때까지 내내 성사를 보지 않는다나.
마치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면 달리 고백할 죄가 없고,
주일 미사 빠지는 것만이 내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인 듯이.
바리사이들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자기네는 의인이라고 여긴다.
회칠하여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그들의 죄는 감추어져 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언급하는 ‘남을 심판하는 이’도 이와 비슷할 게다.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그 이에게서 어떤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기에.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약 육천 명이었다나. 그들이 오늘날의 유다교를 있게 한 장본인들이다. 바리사이의 어원은 ‘분리하다’에서 유래되었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시키고자 애를 썼다.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에서, 둘째는 율법을 잘 모르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되려고 노력하였다. 왜 그랬을까?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율법 준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반 대중과 만나는 것까지도 꺼렸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상당히 인정받았다.
바오로 사도 역시 회심 전에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 교사였다.
아무튼 그들은 법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하느님의 사랑에는 소홀함을 드러냈다.
사랑을 강조한 율법의 근본을 깨닫지 못하였던 거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을 만드신 분,
곧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잔과 접시에 담긴 음식으로 자선을 베풀라신다.
신앙과 수계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삶이 그것을 뒤따르지 않는다면 바리사이적인 형식적 종교 생활에 불과하리라.
겉과 안이 일치하는 삶, 정직하고 진솔한 삶은 존경의 대상이다.
누구나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힘이 실리지 않는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기에. 교회 일은 관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봉사자가 되어야 할 게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관리하기를 좋아하는 어쩜 또 다른 현대판 바리사이가 아닐까?
소수의 정직한 이가 다수의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살려낼 수도 있는데,
그런 이가 바로 우리였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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