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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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코 12,28ㄱㄷ-34 ) |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는 당신 백성에게 회개를 호소하신다. 아시리아도,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길을 걷기를 바라신다(제1독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여쭙는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시자 율법 학자는 깊이 공감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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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 그분께서 베푸셨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며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다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거절하고 있다(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언제나 첫째가는 계명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다음 계명이다.’ 율법 학자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사랑의 실천은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느 선배 사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성당도 지었고, 다른 본당에 가서는 교육관과 수녀원도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였어도 늘 지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 비결은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에 자기가 소모해야 할 에너지 중에서 80퍼센트만 쓸 생각을 한답니다. 나머지 20퍼센트는 취미 활동도 하고, 혼자 고요히 지내며 쉬려고 한답니다.
그렇게 해도 성당을 짓고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남겨 둔 20퍼센트를 결국 써야 할 때가 온다고 합니다. 만일 처음부터 100퍼센트의 최선을 다할 각오로 하게 되면, 결국 일하는 중에 추가로 20퍼센트의 에너지를 더 사용하게 되어, 나중에는 몸도 마음도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가운데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 반면,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 점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만, 진정 마음을 다 쓰고 목숨을 다하며,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할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선배 사제가 남겨 둔 20퍼센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100퍼센트의 욕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80퍼센트를 바치고 그 나머지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헌신하십시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은 버리고 여유를 가지며 사랑하십시오. 그 여유 속에 자신도 가꾸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그래야 그 사랑이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신학생 때에 은사 신부님과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저수지에 빠져서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었네. 그가 세례를 받아야 천당에 갈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저수지 물이 생수이고 이미 머리에 물이 묻었습니다. 그러니 물가에 앉아 손을 펼쳐 얹고 세례를 주면 유효한 세례가 됩니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아닐세. 얼른 물속에 뛰어 들어가 그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머리로만 신앙을 배우려고 하면 마음이 메말라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세분화되어, 지킬 계명 248개와 금기 사항 361개를 합쳐서 613개 조항으로 불어났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밥만 먹으면 율법을 연구했으니, 그들 머릿속에는 율법이 훤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613개 조항은 기억조차 하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이 계명들을 제대로 지키려면 하루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을 위해 생겨난 율법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는 멍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을 속박하는 율법의 멍에를 풀어 주셨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사랑은 하나이되 그 대상은 둘, 곧 하느님과 이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이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이웃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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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 학자는 진심으로 질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무 쉬우면서도 막연한 답변입니다. 하지만 모든 답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의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뺀다면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요?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막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준수’를 사랑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렇게 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계명의 실천’입니다. 사랑하기에 주고 싶어집니다. 애정을 주고, 기쁨을 주고, 삶의 에너지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행위’입니다. ‘생명력’을 주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은총을 주시고 이끄심을 주셨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의 힘’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돌아봐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면, ‘마음과 목숨을 다해’ 참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언제라도 ‘사랑의 척도’는 인내와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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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이든 감동이 있으면 오래 지속됩니다. 작은 감격이라도 주고받으면 만나는 즐거움은 배가됩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감동을 주십니다. 평범한 말과 행동으로 감동을 만들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를 칭찬하십니다. 그의 순수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 역시 큰 감명을 받습니다. 실타래 같은 율법을 그토록 쉽게 해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좋은 만남은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러니 늘 자신을 가꾸고 다스려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봄철엔 바람이 많습니다. 바람이 자주 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는 가지마다 새싹을 틔우려 합니다. 그러려면 그곳까지 물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이 작업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봄철에는 바람이 많다고 합니다. 신비스러운 자연 현상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선한 감정과 아름다운 느낌에 휩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봄바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촉촉하게 하라는 그분의 배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율법 학자의 외침 역시 신선한 봄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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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 시나이 산에서 무려 613개의 율법 조항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다윗은 시편 15편에서처럼 이 율법들을 열 개의 율법으로 요약하여 가르쳤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다시 여섯 가지, 곧 “의롭게 걷는 이와 정직하게 말하는 이, 강압으로 얻는 이익을 업신여기는 이, 뇌물을 받지 않으려고 제 손을 뿌리치는 이, 살인하자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 이, 악한 일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이”(이사 33,15)로 축소하여 가르쳤습니다.
또한 미카 예언자는 이를 다시 세 가지, 곧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미카 6,8)으로 요약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요약은 율법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다시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본질상 서로 편의에 따라 구별될 수 있을지언정 논리적으로는 결코 구분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랑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본질적으로 완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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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는 유난히 바람이 많습니다. 바람이 잦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는 가지 끝마다 싹을 틔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곳까지 물을 올려야 합니다. 힘든 이 작업에 바람이 동참합니다. 가지를 흔들어 물이 쉽게 올라가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봄철에 바람이 많다고 합니다. 신비스러운 자연현상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선한 감정과 아름다운 느낌에 휩싸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따듯함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체험들은 우리의 생명력을 자극하는 봄바람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따뜻함을 심고, 기쁨과 평온함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지금도 그분께서는 자연의 바람처럼 사랑의 싹을 틔우라시며 은총의 물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 봄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며 남모르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도 바람이 많이 붑니다. 무심코 바라보는 바람이지만 나무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바람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운을 전하는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애덕 실천
-전영준 신부-
요사이 신앙인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관심을 갖는 영성생활은 자연 질서에 속한 우리가 초자연 질서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이기 때문에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영혼이 이승에 살면서 초월적 존재이신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를 가늠할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주변에서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수많은 주장이 있어도 그 진위를 판단하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과 부족함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다시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경에서 묘사된 하느님을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진노의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다시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전하고 있다.
만일 우리 인간 영혼이 살아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당연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속성에 물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한다면, 애덕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시기에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영성 생활의 완성은 애덕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이제야 알겠습니다.>
수도자로 양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몇 가지 작업이 있습니다. 그 가운에 하나가 ‘영적자서전’입니다. 지금까지의 내 삶 안에서 펼쳐져왔던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것입니다.
영적자서전을 다 쓰고 난 한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돌아보니 굽이굽이 어느 한곳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로지 그분 사랑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형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저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오로지 나의 역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인생은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느님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철저하게도 부족한 나, 정말 보잘 것 없는 나, 쥐뿔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 너무도 부당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신 하느님 사랑의 역사가 제 지난 삶이었습니다. 그분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그분 연민의 눈길이 아니었더라면, 그분 사랑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단 한 순간도 서있을 수 없었던 날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일생일대의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우리를 향한 그분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해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정확한 실체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안 만큼, 이해한 만큼 더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알게 되는 그 순간, 그분의 정체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더 한층 깊어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을 파악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사랑이 용광로보다 더 뜨겁고 강렬합니다. 때로 너무나 절절합니다. 때로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때로 필요한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차가운 사랑, 냉정한 사랑도 보내십니다. 때로 우리가 교만의 늪에 빠져있을 때, 때로 우리가 착각 속에 기고만장해있을 때, 때로 우리가 나태해져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고통이라는 사랑의 매를 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다양한 순간들이 우리 삶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성공의 순간, 기쁨의 순간, 환희의 순간... 그러나 때로 실패의 순간,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했었습니다. 그 모든 국면들은 다 하느님 사랑의 발로였다는 것을...

새벽을 열며
조명언 마태오신부
‘사랑이 밥 먹여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돈, 돈, 돈’을 외칩니다. 물론 돈 만이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답니다. 실제로 큰 부자들도 자신이 불행하다면서 삶을 스스로 마감 짓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돈’이란 정말로 어느 정도일까요?
‘어느 정도의 돈’이란 결국 자신의 욕심 만큼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은 아무리 채워도 부족하게만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간절하게 요구하다 보면, 처음에 가졌던 어느 정도를 뛰어 넘었어도 계속해서 아직도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욕심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눈에 보이고,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또 돈은 계속 가지고 가져도 부족함을 느끼는 반면, 사랑은 약간의 사랑만으로도 커다란 만족과 행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2학년의 시가 인터넷에 크게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 줄 모르겠다.
아빠가 강아지나 냉장고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즉, 전혀 사랑이 없는 아빠에 대한 자녀의 마음입니다. 이런 아빠와 자녀 사이에 과연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들에게 사랑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나오듯이 율법학자의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곧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이르시지요.
사랑은 ‘있다 없다’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있다 없다’로 사랑의 기준을 따지는 사람은 자신이 받는 사랑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사용할 줄 아느냐 모르냐 입니다. 사랑은 내 자신이 먼저 사용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효과가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중요한 사랑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내 욕심만을 채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럴수록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비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 추억의 반짝임과 속삭임은 대단히 소중하다(메리 웹).
안개가 자욱했던 어젯밤. 우리 마음에도 뭐가 잔뜩 끼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 동네 목욕탕의 사우나 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도 뜨거운 것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뜨거운 곳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나가지 않더군요. 저 역시 오기가 생겨서 뜨겁다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사우나 실 안에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지기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모래가 다 떨어지는 시간이 한 10분 정도나 될까요?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알았습니다. 10분이라는 시간도 이렇게 긴 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그냥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10분이라는 시간도 뜨거운 사우나 실 안에서는 그렇게 긴 시간인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냥 쓸데없는 시간으로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하루 온 종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10분이라도 그 시간이 엄청나게 긴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루 10분 정도의 사랑 실천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단순히 ‘10분’이라고 하면 얼마 안 되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이 모이고 모이면 엄청난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하느님의 나라는 내게서 가까워집니다.
불가분의 관계
반영억신부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고 말씀하셨습니다.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하고 이르셨습니다.(마르12,34)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반드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이미 천상을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