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반면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무더위가 닥쳐와도 그 잎이 푸르고, 가물 때에도 줄곧 열매를 맺는다(제1독서).
부자와 라자로의 삶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온갖 좋은 것을 누리는 반면, 라자로는 굶주림과 아픔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나 죽어서는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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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으로, 시온과 사마리아 산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혼탁한 사회 속에서 부패와 사치에 빠져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질책이다. 특권층에 대한 주님의 불행 선언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말한다. 그 내용은,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며,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는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부자와 라자로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풍족한 삶을 사는 부자와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사는 라자로가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결말은 하늘과 땅 사이만큼 벌어진다. 라자로가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가 참된 삶을 살지 못한 결과이다(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16,19-31)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은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판을 쳐 간다고 개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꾸만 가난해져 가고, 부자들은 점점 더 부유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인간의 삶은 잠깐이기 때문에 부러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가 신앙생활은 잘하였는지,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하였는지, 그의 성격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습니다. 그의 몸은 종기투성이고,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죽음 뒤에 이 두 사람의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이승에서의 삶을 각자의 처지에 따라 배려하신 결과입니다.
가난한 이는 그렇더라도, 부자는 무척이나 억울할 것입니다. 생전에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젠 마실 물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부자는 생전에 열심히 살긴 하였습니다만,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저 자신만 죄짓지 않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온갖 좋은 것은 다 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 사랑, 정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의 삶 또한 고귀한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가련한 부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요? 혹시 부자의 마음을 닮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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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알려진 것은 거지나 다름없는 처지라는 것뿐입니다. 그는 부잣집 대문 앞에서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였습니다. 몸에는 종기가 돋아 개들이 핥았다고 하니 비참하기 짝이 없는 처지의 사람입니다.
부자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으며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었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아무튼 두 사람의 생활은 극명하게 달랐고, 그렇게 살다가 둘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쪽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라자로는 복된 사람의 대열에 들어갔고, 부자는 고통 속에 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저세상 삶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고, 라자로는 착한 일을 하였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신분과 상황은 죽는 순간에 바로 끝납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의 신분이 저승에서도 보장되겠지.’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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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다음에 정반대의 삶을 맞이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아쉬운 곳에서 고통을 받습니다.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의 주제로 ‘회개’를 꼽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자는 무엇을 회개해야 했던 것일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구절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닌 재력으로 권세를 부렸다는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은 자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이겠습니까?
오늘 부자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도 라자로가 죽기까지 전혀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통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라자로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라자로가 그렇게 길바닥에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한 여인이 세상의 온갖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항의하였습니다.
“왜 당신은 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널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거나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두고 하느님께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비겁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 아주 조금씩만 나누어도 세상의 아픔을 덜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
반영억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관심
-권지호 신부 -
미국 지하철 안에서 일어나는 강도 사건은 러시아워 때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만원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변을 당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도 일어납니다. 혼자 사는 옆집 사람이 죽었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송장 썩는 냄새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뉴스는 이제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거지 나자로의 얘기를 통하여 우리의 무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가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한 일은, 그저 자기 돈으로 잘 먹고 잘 산 것뿐입니다. 그것이 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바로 자기 집 대문간에 앉아 있던 거지 나자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이런 모습은 현대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무관심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가슴 뜨끔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모두가 자기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때,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웃에게 관심을 두었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이기적인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참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모습을 보고 모두들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은총 덕분입니다. 믿음은 넓은 시야로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과 먼 이웃을 자애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신앙은 주님의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으로 오늘 우리는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건강한 균형감각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애로운 주님의 베푸시는 마음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비로움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빕니다.
아멘.
무관심이 가장 큰 죄
-김경진 신부-
오늘 복음은 세상의 물질을 즐기느라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가 맞는 최후를 보여줍니다. 그 기준은 바로 선행의 실천 여부에 있다는 것을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그가 악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라자로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는데 모른 척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이 그의 죄였습니다. 무관심은 이처럼 우리를 가장 큰 죄악으로, 영적인 살인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 또한 또다시 찾아오는 제2의 라자로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나눌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삶은 하느님 대전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을 남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언가를 누구에게 줄 때면 언제나 계산하지 않고 무상으로 주셨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평소 누군가를 애정을 갖고 돌보지 못해 자책하고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저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는 주고 또 주면서 저절로 익어가는 벼 이삭을 닮아보기를 주님께 청해 봅니다. 가난으로 신음하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