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날은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더욱 가다듬도록 기도한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3-56)
말씀의 초대
솔로몬은 하느님께 역사상 처음으로 성전을 지어 바치며 주님의 계약 궤를 성전에 모시려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들을 소집한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와 함께 정성스러운 제사를 드렸다. 그런 다음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메고 지성소에 안치하였다. 궤 안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새긴 돌 판 두 개가 있었다(제1독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와 낫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의 딱한 처지를 보시고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따뜻한 벗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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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대보름 아침, 동네 어르신이 어린 저에게 더위를 판다고 이름 부르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연을 직접 만들어 연 놀이를 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해가 질 무렵, 연줄을 끊고 연을 날려 보내면서 아쉬워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오곡밥을 짓고 갖가지 나물들을 무쳐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따스한 정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정월 대보름날의 아름다웠던 풍속이 그립습니다. 오늘 대보름에는 지난해에 농사지어 말려 놓은 무시래기를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종합 병원 응급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빠른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은 발을 동동 구를 만큼 애절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이 간절한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구원으로 이끈 것입니다.
기적의 힘은 분명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이웃 사람들의 우정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갈망,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 사이의 인정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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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동네방네 소문을 냅니다. 어떤 병도 고쳐 주시는 ‘그분’께서 오셨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병든 이를 들것에 눕혀 그분께 데려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듯 민중과 예수님의 만남은 치유를 통한 접촉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병을 낫게 하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청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예수님의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체 앞에서 삶의 아픔을 말씀드리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기에 하지 못합니다. 기적을 어마어마한 무엇으로 여기기에 ‘못 느끼고’ 있습니다.
기적은 따뜻함입니다.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훈훈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이를 선뜻 낫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하느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열었기에 그들은 뜨거움을 느꼈고,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면 ‘복음의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됩니다. 치유를 베푸셨던 ‘기적의 그분’을 만나는 것이 됩니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적인 영성체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가끔은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문득 영혼의 힘과 생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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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곳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펼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많았기에 그분께서 직접 다가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도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환자들을 들것에 눕혀 자꾸만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간절함이 배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병이 나아 돌아온 이웃들을 눈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문성호 신부(구포성당 주임)
마르코 6,53-56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겐네사렛 지역으로 찾아가십니다. 이 지역은 호수 뒤로 기노사르(Ginnosar)평야가 펼쳐져 있었기에 겐네사렛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겐네사렛 지역은 갈릴래아 지방에 속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 지방은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 지방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적인 면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기에 이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이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신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이 지역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병자들을 들 것에 눕혀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 어떤 곳에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절박함과 간절함이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당시에도 믿음을 가지고 애를 썼던 사람들만이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적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였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지붕을 뚫고 들어가서 예수님께 치유받기를 원하였고, 백인대장은 보장받은 신분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뛰어넘는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딸를 치유받을 수 있었으며, 하혈병에 걸린 여인은 단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투신하고 헌신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투신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바로 옆에 주님이 계셔도 만나볼 수 없으며 치유받을 수도 없었고 삶이 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체험하고 주님의 은총을 가슴에 깊이 담기 위해서는 그분께 투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를 구원해줄 수 없으며, 치유해 줄 수 없다는 오롯한 마음으로 봉헌하는 전인적인 투신이 뒷받침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고 또 부수적으로 치유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투신하지 않고 주님의 곁만 겉돌고 있다면 주님의 능력을 끝내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으려고 애썼던 그 절박하고 간절한 믿음, 이것이 주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길이며 거기에 치유의 은사가 은총으로 주어짐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분은 그냥 취미 차원에서 믿거나 또 자녀 교육상 유익하기 때문에 따르게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정말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그분이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으로 살 때 체험할 수 있고 나 자신이 그 분 안에서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깊이 믿고 체험하는 주님 은총 가득한 기쁜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들.
-김찬선신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도 많습니다. 12년 동안 하혈 병을 앓은 부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환자들도 그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이들이 감히 하느님께 손을 대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감히 당신께 손을 대었다고 하셨을까요?
아마 이들도 하느님께 손을 댄다고 생각하였다면 아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고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듯이 손을 대기는커녕 오히려 멀찍이 떨어져 무릎 꿇고는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십니다.
이는 마치 겨울 청천 하늘에 달이 잎새 없는 나뭇가지에 걸리듯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걸리어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느님이며 인간이시라는 것은 골치 아픈 신학의 문제가 아니고 도그마의 문제도 아닙니다. 만남의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느낌의 문제이고 감동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내려오시어 우리의 손에 걸리고, 우리의 귀에 걸리고, 우리의 코에 걸리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하느님의 겸손과 사랑에 우리는 프란치스코처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시중을 들어라
반영억신부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 받지 못 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 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랑합니다. 가톨릭성가 32번 / 언제나 주님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빠지지 말고(미사 참례, 구역 모임등)
두번째는 고사리 입니다.
세째는 소화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