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8일 월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에도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 파리에서 공부하고서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위대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는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코 3,22-30)
구약에서는 죄를 용서받고자 대사제가 동물의 피를 성소에서 봉헌하였지만, 이는 신약의 예표일 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몸소 제물로 삼아 참된 성소인 하늘에 바로 봉헌하신 것이다(제1독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라고 중상모략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악마의 짓거리로 몰아세우는 율법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어둠을 통해 어둠을 쫓아낸다는 것인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둠을 사라지게 하려면 빛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당신의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의 현존을 거부하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마저 거부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구원의 움직임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도 성령의 작용에 따른 것인데, 그러한 사랑과 자비의 숨결을 모독하고 있다면 아무리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시려고 해도 본인 스스로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어둠을 쫓으려면 빛이 필요한 법인데, 스스로 빛의 작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용서의 손길마저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를 용서하시고, 모든 이가 용서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힘을 단순히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거부하고 모독한다면, 그는 탯줄을 잃은 아기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거짓은 밝혀지고
반영억라파엘신부
소위‘열심 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경제적인 출혈을 낳으면서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마르3,21)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기도 하였고, 율법학자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22).고도 하였고 사람들은“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3,30)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반대자가 상대하기 거북하고 비겁하다고 해서 그를 악령에 사로잡힌 정신 이상자로 몰아 붙여 매장 시키려는 것은 아주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풍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상대방의 속을 환히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는 행위,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 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떤 특정한 죄라기보다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거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선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선물하시는데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결코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사랑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
작은형제회 오상선(바오로)신부 2008-01-27
언젠가 어떤 자매가 "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같아 늘 마음이 어둡습니다"고 했다.
"혹시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범한 것은 아닐까에 대한 의구심이 늘 괴롭힙니다"고 했다.
그래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죄인들이다.
하지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신 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지만 행복할 수 있을 뿐이다.집안에 베엘제불이 있다면?
때때로 잘살던 집이 갑자기 몰락해서 학기 초와 학기 말의 사정이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어떤 가정은 사랑으로 뭉치는가 하면 어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뿐 아니라 이제 꽃피기 시작한 인생을 절망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다.
과연 우리의 죄 중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을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면 그런 죄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정말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좌절감을 갖지 않게 되길 희망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어떤 죄도 다 용서받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하였다.
예수님께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싫다"고 하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선한 일, 사람을 위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 질투, 비방하여 악마가 하는 일로 매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오로지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얼토당토 않는 시기와 질투, 비방을 받고 하시는 말씀이시다.
가끔 우리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정말 가슴아픈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 말씀해 주시는 선을 악마가 하는 일로 매도할 때이다.
"우리는 늘 하느님께서 다른 형제 자매들을 통해 이루시고 말씀해 주시는 선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한다"고 성 프란치스코도 권고하신 바있다.
우리는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업적과 말씀에는 기뻐하면서 다른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업적과 말씀에 기뻐하기보다는 질투와 시기심 때문에 그 형제자매들을 비방함으로써 그 일을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과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그 때문에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가장 큰 죄는 바로 하느님 자신을 비방하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끔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다른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그 크신 업적과 공로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또 그 때문에 그 형제자매에게도 축하와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지...
나주 율리아 문제와 사적계시 등으로 시끄럽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와 모든 신자들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선과 업적을 무시하면서
자신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선과 업적만을 자랑하고 주장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용서받지 못할 죄',
즉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조명연 마태오
성숙할 때까지의 성장기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긴 동물은 무엇일까요? 코끼리? 사자? 고래? 거북이? 아닙니다. 어떤 동물보다도 성장 기간이 가장 긴 동물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열세인 체력을 만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체력이 뛰어난 동물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우수한 두뇌가 필요했지요. 그리고 이 두뇌를 발달시키기 위해서 그만큼의 장기간의 성장기간이 요구된 것입니다.
따라서 단 시간에 무엇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단 시간에 이룬 내 자신이 무조건 맞다는 어리석음 역시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계속해서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겸손한 마음,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리고 성인 성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첫 모습은 그리 훌륭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을 알아가게 되었으며,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참 증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다보니 ‘겸손은 땅이다’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땅은 하늘보다 낮은 곳에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밟힙니다. 그리고 더러운 쓰레기까지 받아들이고 있지요.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겸손이 곧 땅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낮은 곳에 생명이 시작되며, 그 낮은 곳에서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낮고 밟히고 때로는 더러운 쓰레기까지 받아들여서 별 볼 것 없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생명의 시작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겸손, 자신을 낮춰 생명의 싹이 움터 나올 수 있게 하는 겸손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비방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맞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존경과 사랑을 가득 받던 그가 이렇게 헛된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기에 자신보다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특별한 교육도 받지 않았던 예수님께 고개를 숙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니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향해 불평불만은 물론이고, 갖은 비방을 던질 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예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법. 바로 겸손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