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 환자 치유. (루카 5,12-16)

2013. 1. 11. 오전 7:32:53

글자


2013 1 11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물[세례]과 피[십자가상의 죽음]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드러났다. 이 모든 일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사실을 믿는다(제1독서). 예수님 시대의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이는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시며 고쳐 주셨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율법보다 위에 있는 분,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난[공현] 것이다(복음).

☆☆☆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다는 성령의 증언을 믿는 것이다(제1독서). 당시 나병 환자들은 별도의 장소에서 격리된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길을 갈 때는 가는 곳마다 자신에게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며 다녀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들에게 다가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치유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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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며 왜 굳이 그의 몸에 손을 대셨을까요? 사실 다른 대목에 보면 한 말씀만으로도 병을 치유하셨습니다.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동안 나병 환자를 그 누구도 만져 주지 않았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만져 줌’(tou+h)을 통한 사랑을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습니다. 원숭이를 상대로 실험했습니다. 어린 원숭이를 만져 주지 않았더니 우울증과 여러 질병에 시달리다가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버려진 아기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발견되었습니다. 생후 10주에서 6개월 사이의 아기들을 조사한 결과, 엄마가 잘 쓰다듬어 준 아기는 그렇지 못한 아기에 비해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고, 또 잘 토하거나 설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다른 연구로는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신경질적이거나 우울증이 있는 성인 여자는 포옹 횟수가 많고 포옹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병에서 회복되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다른 이에게 사랑의 손길로 다가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생명을 줍니다. 아니,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절로 손이 가게 되고 그 손이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엄마의 손이 약손이 되고, 예수님의 손이 생명의 손이 되었겠지요. 두 손 다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파괴의 손입니까, 생명의 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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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병 환자 시인 한하운 님의 ‘파랑새’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나병이 주는 고독과 사무치는 서러움이 묻어 있는 시입니다. 그 흉해진 얼굴을 내밀 수 없어 소록도 외딴섬에 꼭꼭 숨어 살아야 했던 시인은, 죽어서라도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르고 싶어 합니다. ‘푸른 슬픔’이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노래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런 슬픈 노래를 부를지 모릅니다. 육신의 얼굴은 열심히 가꾸며 살지만, 정녕 우리의 흉한 내면의 얼굴은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시기, 질투와 분노, 온갖 욕망들이 종기처럼 돌출해 있는 내면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의 나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병의 특징은 감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살점이 하나둘 떨어지고 더욱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이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아무런 감각 없이 점점 더 본디의 맑고 깨끗한 얼굴을 잃어 갑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던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 우리 내면을 치유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 앞에 나서서 겸손되이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사람, 과연 그 사람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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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한센인(나병 환자)은 온몸으로 청합니다. 언제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의 절박함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안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의 청원대로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얼마나 기다렸던 음성인지요? 말씀을 듣는 순간, 그는 바뀐 몸을 깨닫게 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기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센인은 천국을 체험합니다. 고을 사람들 역시 감동합니다. 믿음의 자극을 받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는지요?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한다면 어찌 그분께서 외면하실는지요? 우리의 영혼에 손을 대시며 기적의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게르하르트 한센역시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노르웨이 베르겐 의대교수였습니다. ‘베르겐은 노르웨이의 두 번째 도시이며, 아름다운 항구입니다. 이곳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센인 요양소가 있습니다. ‘한센은 그곳에서 나병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마침내 나병으로 생기는 혹 안에서 나균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 전염병임을 증명했습니다. 이후 나병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부르게 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낳습니다.

 

 

☆☆☆

 

평생 가면을 만들며 살아온 이가 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가면 만들기를 중단합니다. 만든 가면도 결코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의 가면을 쓰면 가면이 얼굴에 붙어 그 가면의 얼굴이 된다는 겁니다. 신청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얼굴을 고쳐 달라며 애걸하였습니다.
소문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호기심에 임금은 그를 불러들이지요. “네가 만드는 가면이 놀랍다고 들었다. 어떠냐? 나한테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 가면 만드는 이가 대답합니다. “이미 가면을 쓰고 계시면서 또 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임금은 화를 냅니다. “뭐, 내가 가면을 썼다고?” 그가 또 말합니다. “임금님은 마음과는 반대의 얼굴 표정을 자주 짓지 않습니까? 그게 가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자 임금은 웃으며 말합니다. “네 말이 맞다. 그러고 보니 넌 사람들에게 진짜로 가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구나.

“그렇지요. 저는 가면 사러 오는 이에게 삼 년 동안 좋은 마음을 지닌 뒤에 다시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얼굴이 그렇게 변해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어느 날 가면을 씌우는 흉내를 내고는 부탁합니다. ‘이 아름다운 가면이 흉하게 변할 수 있으니 마음을 바르게 쓰며 살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육체는 건강하나 마음은 나병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치유 받은 나환우처럼 하느님 앞에 우리의 허물과 나약함, 죄와 고통을 낱낱이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작은 자로 남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어미개가 새끼를 낳을 때 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학교 돌아오자마자 책가방 휙 던지고는 개집 주변을 떠날 줄을 모릅니다. 좋아 죽습니다. 안고, 쓰다듬고, 머리 높이 까지 올렸다가 내렸다가...

한 동안 덩치 큰 개들은 찬밥입니다. 아이들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때로 어리다는 것, 작다는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7-8세 되고, 체격도 어른만한 큰개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누구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예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녀석들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간 세상 살아오느라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가는 법도 다 터득했고, 노련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보잘 것 없고, 말썽 많고, 때로 배은망덕한 우리를 이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어딘가가 잘 나서 그럴까요? 특출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우리가 쌓아올린 선행이나 공적을 보시고 사랑하실까요? 우리가 큰 인물,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럴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측은함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작음, 우리의 가련함, 우리의 기가 한풀 크게 꺾인 모습, 우리의 비참함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 인간의 작음과 측은함이 하느님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가 구원이라는 진리를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환우, 그의 인생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나병이 깊어져 온 몸으로 번졌습니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던 시절, 그의 하루하루는 정말 혹독했습니다. 비참한 하루를 끝내고 차디찬 동굴 안에 몸을 눕히면서 드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빨리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 다른 한편으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말짱한 몸으로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여지없이 아침 해는 떠오르고, 강물에 비친 얼굴은 어제보다 더 심해진 상태로 죽음 같은 하루를 또 다시 맞이하곤 했습니다.

이런 나환우의 고통을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모른 척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 한 마디로 그를 죽음과도 같은 투병생활을 끝내게 하십니다. 보송보송한 태초의 피부로 되돌려주십니다.

인간의 불행 앞에 절대로 가만있지 못하시는 자비의 하느님 그 실체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참으로 은혜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요즘 와서 자주 드는 생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절대로 큰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높은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기대치를 높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니까요.

낮은 곳에 서 있다 보면 좋은 것 한 가지는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냉대에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은 끝까지 작은 자로 남는 것입니다.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 이건복 신부-

 

 

◆‘전국 노래자랑의 장수 비결이란 제목의 글을 인터넷을 통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쓴 이는 이 프로그램의 장수 비결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 서민의 삶, 애환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 둘째,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고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송 해 선생님의 후덕한 진행 솜씨. 셋째, 공연문화가 별로 없는 지방을 직접 찾아가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점. 넷째, 끼와 재능이 있는 연예 지망생들의 등용문이 된다는 점.
이렇게 정리된 글을 읽으면서 충분히 성공할 준비가 된 프로그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열한 방송 프로그램의 경쟁에서 장수할 수 있는 이유에서 저는 전교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공생활 시기에 예수님을 만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당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곧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삶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통해 예수님의 존재와 가치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적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가치와 행복한 삶을 얻게 된다는 기대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성지에서 일하는 저도 깊이 반성해 봅니다. 과연 고통스러워 찾아온 순례객들의 상처와 애환을 어루만져 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같이 편안하고 따뜻하게 순례객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목표를 이루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참된 삶의 비전을 발견한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께 모여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외딴 곳으로 물러가
 반영억 라파엘신부
날이 다시 추워졌습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순례오시는 분들을 보며 저의 게으름을 반성합니다. 저는 춥다고 움츠리며 성당에서 조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분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당을 찾아오십니다. 오시는 분을 정성껏 맞이하지 못해도 순례객들은 복된 은혜의 시간에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성모님의 품을 그리워했기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당에 있는 저는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기도를 소홀히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한 순간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너무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팅 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기도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기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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